

사시사철 피는 꽃
Ensemble Stars!
이츠키 슈 x 카게히라 미카
春.
완연한 봄이었다. 카게히라는 창문을 열어 느껴지는 바람에 눈을 지그시 감고 향을 들이마셨다. 먼 곳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엔 막 피어난 달달한 꽃향기가 가득했다. 수예부실에 둔 방향제에서도 이런 냄새가 나면 참 좋을 텐데, 하고 작게 웃었다. 기분 좋게 떨어지는 햇볕이 적당히 따뜻하다. 밤새 이불 안에서 지냈음에도 찬 손을 바깥으로 쭉 뻗어 그 온기를 조금이나마 얻고자 했다. 막 일어나 나른함에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휴일인가, 아닌가. 학교에 가야하는 날이면 이츠키가 깨우러 올 것이고,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둘 것이라 카게히라는 좀 더 봄의 햇살을 만끽하기로 했다. 이런 따뜻한 날만 매일 계속되면 좋겠다고 속으로 여겼다. 날로 세면 그리 긴 겨울이 아님에도 추위가 괴로운 바람에 매년 긴 얼음의 날을 보냈다.
그 순간 귀에서 바스락거리는 것이 있어 급하게 눈을 뜨고 손으로 긁어내자 언제 날아왔는지 파랗고 작은 새순이 손톱에 잘려 바닥으로 팔랑팔랑 떨어졌다. 곧 꽃가루도 모든 것을 뒤덮을 것처럼 날아와 마루를 온통 노랗게 물들일 것이다. 아니면 지금부터 그러거나. 가볍게 재채기를 터트린 카게히라가 창문을 도로 닫았다. 금방 또 찬 기운이 음습하게 올라오는 방 밖에서 이츠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카게히라, 아침이다.”
“응. 내 일어났다.”
“그럼 씻고 내려오지 않고 뭘 꾸물거리고 있냐는 게야. 괜히 걸음하지 않았느냐.”
“미안타. 내 금방 내려갈 기다.”
자는 척을 했으면 방 안에 들어왔을까. 그런 소소한 후회를 뒤로 남긴 채 카게히라가 방문을 열었다. 먼저 내려가고 있는 뒷모습을 보는 가슴이 간지러웠다. 밤 새 보고 싶었다고, 아주 많이. 그 말이 하고 싶어 뛰어가 이츠키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무 때나 멋대로 굴지 말라고 화를 낼까 싶어 고개를 드는데 그가 손을 붙잡고 온기를 전해주었다.
“…넌 곧잘 넘어지니 함부로 뛰거나 하지 마라.”
“응. 내 스승님이 너무 보고 싶었다.”
“고작 몇 시간, 그것도 수면 시간이지 않았느냐. 설마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
카게히라는 고개를 저으며 등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도 아침에 창문을 열었을까? 등에서 파란 풀냄새가 풍겨왔다. 그를 생각하기 위해 잠을 자지 않을 필요는 없었다. 꿈을 꾸면 꼭 그를 보았으니까. 꿈도 꾸지 않을 때엔 금방 눈뜨면 아침이 되었으므로 상관없었다.
이츠키가 말보다 작은 한숨을 내쉬고 쓰다듬던 손을 놓았다. 카게히라는 얌전히 떨어져 그가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했다. 방금 보고 떨어졌는데도 또 달려가 붙들고 싶어졌으나 그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 순 없다. 서둘러 욕실로 들어가 잠옷을 벗어두고 물을 틀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무수한 물방울들이 간지럽게만 느껴졌다.
좋아한다고 했다. 더 멋진 말로 전해주고 싶었으나 자신은 그럴 머리가 없어 그냥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말하기까진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가 이런 감정 따위로 저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까지 닿은 신뢰의 깊이다. 그럼에도 카게히라는 돌려받을 사랑까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사랑하고 싶었다. 불순하다고 꾸지람을 듣게 되더라도 고치지 못할 거란 건 그가 제일 잘 알 테니까.
그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멈춰버린 것처럼 그 표정 그대로, 그 자세 그대로 자신을 노려보았다. 순간 거짓말이라고 말을 주워 담을까, 하던 카게히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존경하고 있다. 경애하고 있는 것도 맞다. 하지만 분명 사랑하는 것도 있다고, 모든 걸 주고 싶은 마음엔 그런 게 같이 있는 거라고. 이유모를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사랑하는 건 아픈 일이란 것을 아라시가 전에 알려주었다. 통각엔 둔해 괜찮다고 말했던 과거의 제가 확실히 바보다.
추위에 새빨개진 코를 훌쩍거리며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는 제 손을 그가 붙들었다. 옷이 더러워진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츠키는 카게히라에게 자신이 수놓은 손수건을 건넸다. 그러며 그는 놀이에 어울려주겠다고 했다. 그 감정은 분명 쏟아낸 후엔 사라질 것이니 그때까진 그 말을 받아두겠다고.
카게히라는 자신이 있었다. 어떤 것이라도 이츠키가 이겨야 제 속이 후련하지만 이 놀이에선 분명 자신이 이길 것이었다. 옛날 동화에 나오는 마법의 물병처럼 저를 뒤집으면 마음에선 계속 그에 대한 사랑이 흘러나올 테니까. 평생 그를 사랑한 채로 죽음을 맞이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발 아래로 흐르는 물을 보며 카게히라가 회상을 멈췄다. 매일 아침 그에게 이기기 위해 그 날을 항상 떠올리는 습관이 생겨 버렸다. 물을 잠그고 수건을 머리 위에 얹었다. 거울 속 젖은 머리카락이 까마귀의 깃털처럼 눅눅하다.
“너란 녀석은, 언제나 굼뜨단 게야. 준비를 서두르도록 해라.”
“응? 스승님, 그거 교복 아이다.”
“…오늘은 주말이다.”
“으응?! 그라믄 우리 오늘 어데 가는 기가?”
이츠키는 주머니에서 종이로 된 티켓을 두 장 꺼내 부엌 테이블 위에 올리곤 버튼이 내려간 커피포트로 향했다. 카게히라는 그가 내려둔 티켓을 집어 들어 유심히 살핀 뒤에야 그게 영화표라는 걸 알아챘다. 막 점심때쯤 시작하는 그 영화의 제목은 ‘마이 페어 레이디’였다.
“스승님… 영화관엔 사람 많을 낀데…….”
“시루 안에 든 속물들 사이에 낄 생각은 없다. 거긴 아둔한 자들이 부러 찾아오는 곳이 아니니 숨쉬기 적당하겠지.”
갈아둔 원두 위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이츠키가 속없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사람들이 많이 가는 영화관에선 요즘 나온 오락성 영화들만 상영할 테고, 그런 건 시간 내서 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나저나 저것은 지금 데이트를 가자고 하는 것인데 고작 그런 점에나 신경 쓰고 있는 것인가. 커피를 잔에 옮겨 담으며 슬쩍 돌아보았다. 머리도 채 빗지 않은 모양새다.
빗을 가져오라고 하자 기쁜 듯 웃고 달려간다. 아침에 뛰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또다. 부엌 입구에 서서 오는 꼴을 보자 위태위태하다. 이츠키는 새삼 저것을 연습시켜 무대에 올리는 제 자신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거의 앞까지 다가온 카게히라의 몸이 위험할 정도로 기울었을 때, 그는 준비라도 하고 있던 것처럼 팔을 뻗어 그 몸체를 받쳐 안았다.
“그렇게 뛰지 말라고 해도 도통 알아먹질 못하는 구나.”
“…그치만 스승님, 스승님이 받아줄 것처럼 보고 있었다 아이가. 내는 스승님이 보고 있으믄 다 괘안타.”
해맑게 웃는 모습에선 봄의 향기가 밀려들었다. 그건 찬바람을 머금고도 따뜻하고, 조금 씁쓰름하면서도 달콤하고, 지난해에도 피었지만 다시금 태어난 생명 같다. 이것이 이런 향을 뿜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츠키가 햇볕에 잘 말린 봉제인형을 끌어안는 것처럼 카게히라를 한가득 품에 안았다. 안에 꽃이라도 품은 것처럼 폭삭, 은은한 냄새가 풍겼다.
이츠키는 이럴 때면 그와의 놀이에서 자신이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보았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리 높은 산도 깎여 평지가 되고 기다란 강도 언젠간 말라 잡초로 뒤덮이고 말 것이다. 꽃이 지는 것은 그거보단 훨씬 빠르다. 그토록 덧없기 때문에 이츠키는 의기양양했다. 본래 아름다운 것이란 뭐든 덧없는 것이지만 감정이란 것은 산과 강보다 빠르게 변해버리고 마는 속절없는 것이라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철저하게 계산해 시작과 끝을 가늠하지 못한다면. 카게히라는 그게 불가능하다. 자신은 다르고.
유리창 새로 들어온 햇빛에 까마귀가 아스라이 웃었다. 제왕은 시작에서 어렴풋이 끝을 가늠했다.
夏.
풍경이 울렸다. 이츠키는 언제 잠깐 졸았는지 그 소리에 놀라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카게히라가 마루에 서서 물뿌리개로 바깥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여전히 답답할 정도로 긴 팔을 고집하고 있는 꼴이면서 왜 굳이 저런 짓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느 새 목에 맺힌 땀 위로 바람이 불자 곧 서늘해졌다. 물뿌리개의 물이 동났는지 카게히라가 몸을 돌렸다.
“아! 내 때문에 깬 거 아이제? 더워보여가 물 뿌리고 있었다.”
카게히라의 시선이 흔들리는 풍경의 물고기에 매달렸다. 이츠키는 저것이 보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하며 속을 식혔다. 예쁘다고 하기에 기껏 사다주었더니 제 방도 아니고 이 방에 달아두어 틈만 나면 구경하러 오곤 했다. 이츠키는 저 작은 머리 안에서 뭐가 그렇게 복잡한 생각들이 오가는지 이해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저지하는 것 또한 삼갔다. 그저 그가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그렇게 내버려둘 수 있었다.
“스승님.”
“뭐냐.”
“봄에 핀 꽃이 아직 안 졌나보다. 달달한 냄새가 난데이.”
“모든 것은 철이 있는 법이다. 봄에는 봄에 필 꽃이 피고, 여름엔 여름에 필 꽃이 피는 법이지.”
카게히라는 손을 들어 눈으로 쏟아지는 빛을 가리고 하늘에서 흔들리는 황동물고기를 멍하니 응시했다. 연한 하늘색 하늘에서 헤엄이라도 치는 것처럼 여유롭고 나긋하다. 아마 거센 바람이 불면 저 모양도 위태롭게 변해버리고 말겠지만, 아직은 괜찮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유유히 나아가는 것도.
작게 웃어주고 한숨과 함께 책상으로 시선을 돌리는 이츠키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는 제가 다가가는 줄 알면서도 모른척하다 놀라게 하지 말라며 꾸지람을 늘어놓곤 한다. 카게히라도 그가 그런 줄 알지만 조심조심 그를 붙들면 수줍은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즐거웠다. 오늘은 고개를 슬쩍 어깨너머로 내밀어볼까.
그렇게 잘 다림질 된 하얀 셔츠 위로 고개를 내밀고 이츠키를 보려 목을 살짝 돌렸다. 그러나 이츠키도 마찬가지로 카게히라를 보려 턱을 살짝 틀었기 때문에 마주보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둥근 코에 날선 코가 스쳤다. 살에 베이기라도 한 것처럼 카게히라가 화들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놀, 놀랬제…….”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오더니, 네가 더 놀란 것 같구나.”
딸랑, 갑자기 불어친 바람에 청명하고 또렷하게 소리가 울렸다. 평소라면 조금 들떴을 카게히라는 아쉽게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귀가 막힌 것처럼 먹먹하고, 눈이 먼 것처럼 시야가 아찔했다. 넘어질 것 같아 그의 팔을 붙들자 그의 팔 하나가 몸뚱이를 감싸 안아왔다.
아주 오래된 옛날 만화에선 첫 키스에서 어떤 맛이 난다느니, 어떤 느낌이 난다느니, 그런 말들이 있었다. 하지만 카게히라는 사랑에 맛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의 키스에선 오래 돼 메마르고 끈끈해진 껌 같은 것이 느껴졌다. 뱉고 싶었다는 뜻이 아니라 여름 같은 것이었다. 조금 뜨겁고, 텁텁하고, 끈적거렸다. 그런 여름이었다.
“…스승… ”
“칫.”
“우리 키스할… 때인 기가. 여름에 여름 꽃 피는 것처럼.”
떨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번엔 눈을 내리감고 카게히라가 다시 이츠키에게 다가갔다. 수줍게 트인 입술 사이로 다시 이츠키가 닿아왔다. 가늘게 눈을 내리깔고 파르르 떨리는 카게히라의 살결을 구경하던 그의 눈도 곧 완전히 감긴다. 카게히라의 입 안에서는 마치 돋아나는 것 같은 꽃향기가 풍겼다. 봄에 핀 꽃이 아직 지지 않았다느니, 혹시 스스로를 두고 한 말인가. 그렇다면 멍청한 머리로도 꽤 용썼다 싶어 이츠키가 속으로 웃었다. 밖에선 매미가 그 속을 대변하는 것처럼 찌르르, 찌르르 하고 암컷을 찾아 울어 댔다.
그 소리가 귀에 닿을 때쯤, 두 번째 키스가 끝이 났다. 두 사람 다 새빨갛게 열이 오른 얼굴이었다. 카게히라가 손을 들어 늘어진 소매로 제 뺨을 지그시 눌렀다.
“……스승님이랑 첫 키스… 할 줄 몰랐다. 내 이래 행복해도 되는 기가…….”
“네 사랑을 퍼내기 위한 것이다. 언제든 질리면 말해라.”
이츠키는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의 말과 행동에 욱신, 가끔 찾아오는 통증이 속을 쑤셔댔다. 분명 분수에 맞지도 않는 행위를 그와 나눴음에도 눈물이 날 것처럼 아렸다. 바늘에 찔린 것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그것보단 더 큰 바늘이 저를 찌르고 있는 것이다. 통증을 참기 위해 윗니로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의 타액으로 촉촉해진 입술이 타인의 것인 것처럼 조금은 낯선 맛이 났다.
그 순간 어느 샌가 몰려온 구름에 태양이 가려지고 거세게 바람이 일었다. 휘날려 어디론가 멀리 사라질 것처럼 흔들리는 풍경에 카게히라가 다급하게 그쪽으로 달려가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컴컴한 회색빛 구름 아래 위태위태하게 흔들리는 모양이 태풍이라도 만난 것 같다. 이츠키가 책상에서 일어나 카게히라의 쪽으로 다가왔다.
“내일부턴 장마인가.”
“더 추워지나.”
“아마. 풍경은 내려두었다가 날이 가라앉으면 다시… ”
풍경으로 향하는 이츠키의 손을 카게히라가 붙잡아 말렸다. 필시 바람이라도 더 세게 불면 날아가 버릴 지도 모르는데 그토록 좋아하면서 왜. 카게히라는 그가 기어코 손을 내릴 때까지 팔목을 잡고 있다가 어두운 하늘 아래 흔들리는 풍경으로 눈을 돌렸다. 아까까지 환하게 빛나던 고양이 같은 눈동자는 오지도 않은 비에 젖은 것처럼 눅눅했다.
곧 빠르게 지나가던 먹구름이 틈을 내어 태양이 고개를 내밀게 하고 그렇게 빛이 내리자 매미도 덩달아 다시 울기 시작했다. 저 건물을 너머에선 얼마나 더 많은 검은 구름들이 오고 있을까. 이츠키가 먼 곳을 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찌푸렸다.
“좋아할 기다.”
“뭘 말이냐.”
“물고기니께 물을 좋아할 기라. 비 오믄 억수로 좋아하겠제.”
그러니까 그냥 두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중얼거리는 카게히라에게서 이츠키가 걸음을 멀리 했다. 마치 작별인사라도 미리 하는 것처럼 아득한 눈으로 살아있지도 않은 물고기를 한참 보고 있었기에. 원래도 생명이 없는 것에 더 친밀하게 구는 아이다. 이츠키는 책상 위를 대충 정리하고 방문 밖으로 나섰다. 입안에서 계속 달콤한 꽃향기가 맴돌았다. 문을 닫고도 한참 거기 서서 입맛을 다셨다. 닫힌 문 뒤에서 카게히라가 저를 보고 있는 줄은 모르고.
장마는 꽤 길고 지루했다. 그동안 카게히라는 풍경이 있는 제 작업실엔 도통 들르지 않았는데, 이츠키는 그를 부러 부르지도 않았고 풍경이 날아간 날에도 알리지 않았다. 그도 그렇게 궁금한 기색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침내 날이 개고 더 지독한 여름햇살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날, 그 방에 들어가 풍경이 있던 자리를 보는 카게히라를 본 이츠키는 그것을 더 꽉 매어둘걸 하고 후회했다.
밝은 햇살 아래 웃는 그 얼굴. 지는 날 없을 꽃처럼 환하게 피어 울던 그 애 얼굴엔 끝난 줄 알았던 장마가 시작됐다. 이츠키는 달려가 그 애를 끌어안고 다시금 입을 맞췄다. 아주 길고 긴, 눅눅한 회색빛의 입맞춤이었다.
秋.
아직 해가 채 뜨기도 전에 이츠키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아니, 전날 밤에 잠을 설친 탓에 그냥 내내 깨어있던 것이다. 요즘은 눈을 감으면 자꾸만 카게히라가 나와 제가 원하든 아니든 끔찍하게 찝찝한 욕망의 수렁에 떨어져버린다. 새파란 새벽을 가르고 주황빛이 방안으로 넘어올 때쯤 팔로 이마를 누르고 눈을 다시 감았다. 그나마 카게히라를 안고 잘 때는 훨씬 나은데 매일 제 방을 찾아오는 것은 아니니 종종 이렇게 잠을 못 잔다. 앓는 소리는 벽을 뚫지 못하고 시트 위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이츠키의 것이 그런 것처럼, 카게히라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불 안에 몸을 둥글게 말고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카게히라의 소리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시트와 침대 아래 바닥엔 밤새 그가 뜯어낸 꽃잎과 이파리들로 너저분했다. 카게히라는 엉망진창인 제 머리카락을 헤집어 또 이상한 게 붙은 건 아닌지 확인했다. 아니, 붙은 건가? 떼어버릴 땐 피부를 찢는 것처럼 아팠다. 찢어진 적은 없지만 아마 그렇게 된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입이나 몸뚱이 어디에선 항상 단 냄새가 풍겼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그 농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틈틈이 확인하지 않으면 새파란 싹이 돋아나거나 꽃봉오리가 올라오기도 했으므로 그는 종종 수업 중에도 자리를 비운 채였다. 꽃을 떼어낸 자리에선 피가 나곤 했기에 보건실에서 잔뜩 얻어온 밴드를 그 위에 붙여 카게히라의 여린 살은 금방 플라스틱 밴드로 뒤덮였다. 그렇게 막혀 딱지가 막 지는 상처를 뚫고 그 자리에서 또 줄기가 돋아날 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왜 이런 건지 이유도 모른다. 알아내고 싶지만 병원에 가는 건 두렵다. 요즘 들어 상처가 늘었다고 조심하라며 엄하게 말하는 이츠키에게 말하기엔 아직 그가 너무 힘들어보였다. 고민을 더 늘게 하고 싶지도, 무대를 올리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돈을 병원비로 쓰기도 싫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츠키와 함께 잔 날엔 그게 더 심했다. 그런 바람에 카게히라는 매일 그의 방에서 함께 잠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만 오늘은 전날 함께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방과 후에 부 활동을 끝까지 견딜 수 있을 터였다.
“…스승님, 가을에도 꽃이 피나?”
“찾으면 있겠지. 코스모스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가을은 과실이 맺히고 익는 계절에 더 알맞다는 게야. 꽃은 시들어 떨어지고 그 자리에 열매가 달리지.”
“노랗고, 작은 꽃도 있나?”
“…글쎄. 들꽃 중엔 많지 않느냐. 그보다 카게히라, 수예 활동에 집중해라. 아직도 직선으로 박음질을 못하다니, 이 실패작 녀석. 원예부라도 만들 생각인가?”
이츠키는 카게히라와 함께 잠들지 않은 다음날엔 유독 더 예민하게 굴었다. 그래도 예전만큼은 아니었지만. 머쓱하게 웃은 카게히라가 지난 주말에 주워온 인형으로 다시 시선을 옮기고 바늘귀에 실을 꽂아 넣었다. 자수라야 그은 선대로 박음질을 하는 것밖에 못하지만 이 검은 토끼에겐 노란색 꽃모양을 새겨주고 싶어 열심히 초크로 밑그림을 그려뒀다.
막 첫 번째 땀을 넣을 때, 제 앞에 그림자가 졌다. 갑자기 내린 어둠에 카게히라가 당황해 고개를 바짝 들고 그대로 이츠키와 입술이 맞닿았다. 요즘 들어 그는 자주 이런 행동을 해왔다. 전보다 더 뜨겁고 애타게 달려드는 것을 카게히라가 거절한 적은 없다. 그러니 이츠키는 더 대담하게 그의 입 안을 탐하고, 또 탐했다. 그럴 때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수수한 향이 밀려들어 떨어지지 못하게 저를 붙들어 댔다.
카게히라 따위의 향에 절제하지 못하고 있다니. 이츠키는 점점 흐려져 가는 끝을 다잡기 위해 더 강렬하게 그를 밀어붙였다. 하지만 마른 볏단에 붙은 불처럼 영 꺼질 기세가 없는 욕망이다. 이렇게 화르륵 타오르다 말겠지, 이츠키는 그렇게 믿었다.
어느 날 밤 제 침대를 찾아온 카게히라의 위에 올라타기 전까지는. 카게히라는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얌전했다. 평생을 조용한 적이 없던 이가 긴장이라도 한 듯 옷을 벗기는 내내도 말 한마디 없었다. 이츠키는 문득 그가 두려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맨 피부 위로 느껴지는 격한 심장박동이나 바르르 떨리고 있는 입술 같은 게. 하지만 단순히 흥분일 수도 있고, 이츠키는 그런 걸 구분할 정도로 여유 있지 않았다. 싫으냐고 두어 번 물었다. 카게히라는 그럴 때마다 고개를 살살 저었다.
그러나 불안한 것처럼 보이는 행동은 시간이 가도 멎어들지 않았다. 이츠키는 그를 괴롭게 하기는 싫었다. 키스도 저와 처음인데, 이런 것도 처음일 게 당연하지 않은가. 제 머리카락 사이에서 뭔가 찾는 것처럼 더듬어대는 카게히라의 손을 붙들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살짝 비친 달빛에 카게히라의 눈이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카게히라, 세상의 모든 건 변한다. 나는 네 사랑이 변하는 것에 걸었지. 기억하느냐?”
“……응. 내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이런 나라도, 모든 걸 조율하는 나라도 분명 예측하지 못하는 게 있는 것이다.”
“내는 변하지 않는다는 거?”
이츠키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 그의 왼쪽 귀에 입술을 갖다 댔다. 겨울이 오지도 않았는데 그 애에게선 지나간 봄이 물씬 맡아졌다. 분명 샤워 후에 로션이라도 바꾼 모양이지 싶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입술을 열었다.
“내가 변하는 것.”
“…스승님?”
“사랑한다. 카게히라, 너 같은 조악한 실패작을 나는 왜인지 원하고 있다는 게야. 그건 아무래도 진부한 사랑 같은 것이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다.”
카게히라는 떠는 걸 멈췄다. 하지만 맞닿은 뺨에 닿는 물기에 이츠키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울고 있었다. 동그랗게 뜨인 눈에서 샘솟은 눈물은 둥근 뺨을 타고 귓가까지 흘러 귓불에서 모여 시트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다. 사랑하니 울지 말라고, 이츠키가 그 눈물에 입술을 내렸다. 카게히라는 복종의 말을 중얼거리면서도 밤새 울음을 멎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신음에 섞어버려 그게 어떤 것인지 이츠키가 알지 못하게 굴었다.
사실 그 날 낮에 카게히라는 이츠키와 헤어지려고 마음먹은 터였다. 그의 말대로 감정이란 쏟고 나면 사라지는 것이었다며, 그도 자신도 이젠 착각 없이 더 솔직하게 굴자고. 카게히라는 그랬다. 자신이 없으면 누가 또 다시 그가 무너졌을 때 돌봐줄까 싶어서. 살아서, 언제까지나 그의 옆에 남아서, 그가 날아오르도록…….
그건 사가미가 권고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병을 하나하나병이라고 진단했다. 비슷한 증상을 가진 병이 없는 희귀병이었다. 사랑을 받으면 몸 안에서 꽃이 자라 꽃나무가 되어버린다는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병이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카게히라는 그렇게 된 저를 이츠키가 더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웃음이 비집어 나왔다. 그만큼 현실감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순간, 모든 계획은 틀어졌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그리고 그도 자신을 원하는데 무슨 권리로 그걸 막아낸단 말인가?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줘버릴 것이다. 인생도, 생명도.
“…내도.”
“…….”
“내도 사랑한데이. 내 전부는 스승님이다 안카나. 다 줄기다. 몸도, 마음도, 목숨까지도. 모두 스승님 거다. …아아… 내 행복하데이. 내 이래 행복하믄 우짜노…….”
이제 슬슬 밤바람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뜨거운 것은 더 빨리 한기에 식어버린다. 둘은 서로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달구고, 또 뜨겁게 적셨다. 맹목적인 사랑의 결실이 맺히기엔 너무나도 빠르게 추위가 가을의 뒤를 쫓았다.
冬.
이츠키는 현관에 주저앉아버렸다. 현관문 밖에서는 애타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시끄럽도록 울렸다. 빨갛게 언 손으로 단단한 문을 그렇게 두드리면 터지도록 아플 텐데도 그만둘 기색이 없다. 이츠키는 귀를 틀어막고 이를 꽉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것을 눈치 채지 못할 수가 있는 지, 인형사로서 자격박탈이다. 손으로 아무리 소리를 막으려 해도 밖에서 울며 비는 목소리는 완전히 끊어지지 않고 제 속에 들어와 날카로운 가시가 되었다.
“스승님! 스승님, 내 다 잘못했다! 제발, 제발…… 내 그냥 옆에만 있게 해도… 응? 내가 미안타, 제발…!”
“가라!! 더 이상 널 보고 싶지 않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게는 볼 장 다 봤다는 게야. 이젠 질렸다. 네 머리털 끝이라도 보기 싫으니 더 이상 내게 모습을 보이지 마라!!”
그건 말도 아니고 고함도 아니다. 괴로움에 내지르는 악이고 비명이었다. 마음 속 바닥에서 어두운 원망이 스물스물 올라와 머리에 올라타더니 자신을 짓눌렀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게 된 것을 스스로 망가트려버렸다. 사랑하는 게 그를 죽이는 줄도 모르고 그게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해 마음을 다해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세계에 신은 있는 것인가? 자신은 신이 맞는가? 아니, 신은 없다. 다시 한 번 그의 안에서 균열이 일었다.
요즘 통 제 방에 찾아오지 않는 카게히라를 보러 그의 방에 들어간 게 화근이었다. 처음으로 그가 아니라 자신이 밤중에 찾아간 것이었다.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들어 헛기침을 하며 이름을 부르는 것에도 그는 달가운 기색 없이 이불 안에서 어정쩡한 대답만을 해왔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는데 발치에 부스러기 같은 게 밟혔다. 먼지라기엔 너무 크고, 물건이라기엔 지나치게 작은.
허리를 굽혀 그게 꽃잎이라는 걸 안 뒤로는 문을 열 때 맡은 알싸한 꽃향기가 머릿속에서부터 지독하게 짙어졌다. 이런 게 왜 여기에……. 여전히 이불 안에서 꼼지락대며 간간히 앓는 소리를 내는 카게히라에게 손을 뻗었다. 올해 들어 새로 산 두꺼운 이불이 속절없이 벗겨지고 그곳에서 화악, 달콤한 향기가 이츠키를 덮쳤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스위치로 걸어가는 걸 알고 다급하게 카게히라가 안된다고 외쳤으나 그에게 명령을 들은 이유는 없다. 이윽고 환해진 방 안에서 피를 흘리는 카게히라가 무수히 많은 꽃과 이파리 사이에서 새파랗게 질려있는 것이 보였다.
그 동안에도 제 몸에서 끊임없이 꽃을 떼어내던 카게히라의 팔을 거칠게 붙들었다. 꽃을 잡아 뜯은 자리에선 피가 줄줄 흐르고 있다. 그동안 봐왔던 상처가 저것이었나. 그런 줄 알면서도 이게 다 무엇이냐고 다그쳤다. 말도 못하고 벌벌 떠는 아이를 잡아 흔들며, 말해, 말하라고, 계속해서 틈도 주지 않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이츠키는 그 병에 대해서 알고 있다. 사랑을 받으면 꽃이 자라나다 결국 꽃나무가 되어버린다는 이야기는 지독하게 슬프고 아름다워 그가 흥미를 가질만한 것이긴 했으니. 하지만 그건 체감할 수 없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감정이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는 얼굴에 결국 머리가 아찔해진 이츠키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방을 뒤져 커다란 가방을 끄집어냈다.
자신에게서 떨어트려야 한다. 오직 그 생각밖에 나지 않아 가방에 대충 옷이며 그가 평소에 특별히 아끼던 인형들을 구겨 넣고 터질 것 같은 가방을 힘으로 잠갔다. 그리고 여전히 잠옷차림인 그 애 어깨에 겉옷을 걸어두고 얇은 손목을 우악스럽게 잡아 바깥으로 끌어냈다. 신발과 가방을 닫기 직전의 문 사이로 내던지고 이츠키는 문을 잠갔다. 꿈을 꾸는 것처럼 머리가 뜨겁고 정신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소리쳤다. 사랑받으면 죽어버린다는데, 그 외에 수가 없지 않나. 사랑받지 않아야 하는 것밖에. 여태 했던 그 어떤 말보다 잔인하고 심한 말을 섞어가며 분수를 알라고 토해내듯이 말했다.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고 가슴을 쥐어 짜내 말하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스승님, 내 춥다… 너무 춥데이. 내 갈 데도 없다 안카나. 내는 스승님 옆밖에 있을 데가 없다. 응? 스승님… 내는 스승님 없는 데에선 살 수 없는 기다…….”
“…….”
조금 돌아온 이성에 이츠키는 급하게 지갑을 챙겨와 문을 열었다. 눈물범벅이 된 카게히라가 문 옆에 쭈그려 앉아 있다 벌떡 일어나 소매로 얼굴을 대충 닦아내고 웃어보였다. 금방 벌게진 얼굴과 손이 발발 떨고 있다. 이츠키는 그를 다시 집 안으로 들이고 제가 바깥으로 나섰다. 뒤에서 카게히라가 우는 소리로 자신을 불러댔다.
“네 거처를 새로 구할 때까진 내가 나가 지내마. 방에 돌아가 쉬어라. 조부님께 연락해 의사도 부르게 하겠다. 놀이는 이제 끝이다, 카게히라. 그것들은 내 감정을 양분으로 피어난 건가? 이젠 필 것도 없겠군. 내 감정은 이제 다 쏟아서 없다.”
“…내 이미 늦었다.”
“카게히라,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거냐? 하여튼 너란 녀석은 머리가 나빠도 한참 나빠. 학습이라는 걸 좀 하라는 게야. 이런 멍청한 녀석은 더 이상 인형으로도 필요 없어.”
“내 스승님 만나기 전엔 항상 외로웠다. 아무도 내 좋아하지도, 돌아보지도 않구 그랬다. 스승님만이 이런 형편없는 나를 봐주고, 사랑해줬데이. 말도 안 되제. 참말로 분수에 안 맞다. 그래도 이제 얼마 안 남았데이. 내 버리지 마라……. 얼마 안 남은 하찮은 생명이래두 내는 스승님께 주고 싶구먼.”
날이 푹하다 싶더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충분히 뿌리칠 수도 있는 나약한 손을 쳐내지도 못하고 돌아보지도 못한 채 이츠키가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극의 이야기는 누가 쓴 것일까. 짜인 대로 흘러가는 거라면 자신의 그 무대처럼 사고라도 나서 엉망진창이 될 수는 없는 건가.
금방 쌓일 것처럼 굵은 눈송이가 천천히 바닥에 내려앉아 서로의 몸을 덮었다. 날이 풀리면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을 부질없는 짓이다. 이츠키의 어깨에 아까 카게히라에게 입혔던 코트가 얹어졌다. 감긴 눈 아래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어차피 죽는 데 스승님 없이 못 산다느니 그런 말… 내 바보인갑다. 고집 부려서 미안하데이. 내 스승님 괴롭게 하는 기가? 내 스승님 힘들게 한 기가? 내가 잘못했다…. 머리를 바닥에 찧으라면 찧고 진흙탕에서 기라면 그래 할 기다. 그니께 옆에만 있게 해도.”
추위에 더 말하지 못하고 덜덜 떠는 몸을 돌아서서 끌어안았다. 코트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더 꽈악 안고 등 뒤에서 주먹을 꽉 쥐어 응어리 진 방향 없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카게히라의 귀 뒤에서 파란 싹이 돋아났다. 눈을 뚫고 자라나는 생명, 그야말로 봄, 그 자체.
그것을 뜯어내려 올라가는 카게히라의 손을 붙들었다.
“그것도 네 녀석의 일부 아니냔 게야. 뜯어내면 아프지 않느냐.”
“…보기 안 좋으니께….”
“아름답다. 너와 어울리는… 화사한 봄의 꽃이구나.”
“겨울에 피믄 겨울 꽃 아이가?”
카게히라는 고개를 들어 이츠키와 눈을 마주치며 애써 웃었다. 그래서 이츠키의 눈물이 떨어지는 곳만 눈이 녹아 달의 표면처럼 둥글게 파였다. 그렇게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에 카게히라가 활짝 피어났다. 수줍게 네 개의 잎을 벌리고 안에 든 술을 드러내는 노란 꽃. 이츠키는 그 꽃에 입을 맞췄다. 겨우 마음이 놓인 카게히라가 목을 놓아 엉엉 울며 저를 꽉 붙들어 오는 게 느껴졌다.
사랑보다 혹독한 겨울이었다. 까만 밤 아래 눈보다 새하얀 카게히라가 마른 입술을 이츠키에게 맞춰왔다. 이츠키는 기꺼이 그 키스에 응해주었다. 미련하도록 변함없이 매달리는 모습이 사랑스러우면서도 마음만은 죽어가는 듯이 아팠다.
回春.
카게히라는 눈에 띄게 말라갔다. 피어난 꽃은 날이 밝으면 시들고, 다시 날이 가는 동안 꽃이 진 자리에서 더 길고 튼튼한 가지가 돋아나 그를 좀먹어 들어가는 탓이었다. 매일 아침 이츠키는 손수 시든 꽃과 이파리들을 떼어내 말끔한 상태로 만들어주고 약을 먹였다. 카게히라의 말대로 진행될 대로 진행되어 손쓸 도리가 없는 상태였지만 이런 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약을 먹고 누워 희미하게 웃어 보인 카게히라는 손을 들어올렸다. 이츠키는 익숙하게 그 마른손을 잡고서 마주 웃어주었다. 눈가에 그늘이 가득한 채였지만 노력하는 것이었다.
“내도 가고 싶었데이. 스승님 졸업식.”
“내키지 않지만 그런 줄 알고 사진을 찍어왔단 게야. 이리 품에 기대 앉아 보거라. 나 말고 다른 녀석들 사진도 애써 찍느라 진이 다 빠졌다.”
카게히라가 더 이상 바깥으로 다니지 못하게 된 뒤로 이츠키는 카메라를 하나 장만했다. 그런 기계에 의존하는 건 영 좋아하지 않지만 그 애가 좋아했던 세상을 보여주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또, 그의 시간을 일부분이나마 멈추어 가둬둘 수 있는 방법도. 이토록 미련을 가지다니. 속물이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만큼 절박했다.
힘없이 품에 안겨 사진을 둘러보는 카게히라의 목 근처에 흉터가 가득하다. 그 중에 하나에선 벌써 가지가 돋아나 꽃봉오리를 금방이라도 피울 것처럼 말고 있다. 이것들 전부 다 카게히라의 생명이다. 자신에게 받치겠다던.
“내는 졸업 못하겠제?”
“나아지면 다시 학교도 갈 수 있을 거다.”
“나루쨩이랑… 하자고 한 것두 많데이.”
“집에 초대해서 하면 되지 않느냐. 지금이라도 불러오게 하겠다.”
“됐다. 나루쨩, 분명 울기만 하다 갈 기다. 내 그거 보믄 너무 아플 것 같데이.”
“…그럼 나와 하자꾸나. 카게히라, 하고 싶은 게 뭔지 말해라.”
카게히라는 고개를 돌려 바깥을 응시했다. 고작 산책이라도 하자고 하는 건가? 이츠키가 휠체어를 가져오려 몸을 틀자 그 팔을 카게히라가 가까스로 잡아 막았다. 걷고 싶은 건가. 당연한 욕구다. 이츠키는 카게히라를 일으키려 한 팔을 제 목에 걸었으나 구부정하게나마 버티던 병약한 몸체는 금방 내려앉아 앓는 소리를 냈다.
그토록 시끄럽게 굴던 것이, 한 시도 조용히 있지 않고 떠들던 것이 이제는 아프다는 말조차 하지 못한다. 원래도 아프다는 말은 할 줄 몰랐지만 그래도 이렇게 죽어가는 통에도 그럴 줄 누가 알았을까. 아린 속을 짓누르며 이츠키가 카게히라를 안아 들었다. 제 어깨에 인형처럼 힘없이 카게히라가 머리를 기대왔다.
“어디를… 가고 싶은 거지.”
“그냥 마당에… 집 근처 아무데나 좋데이.”
“기왕 가는 산책이니 더 좋은 곳이 있을 게 아니냐. 그래, 봄이니 햇살도 따뜻하고…….”
“내는 산책가려는 거 아이다. 스승님, 집 바닥에는 뿌리를 내릴 데가 없지 않나? 내 그라믄 진짜 죽어삐는 기다.”
묏자리를 보자고 한다. 이츠키는 속이 무너져 내려 주저앉을 뻔 했으나 가까스로 견뎌내고 카게히라를 안은 채 어디론가 터덕터덕 걸어가기 시작했다. 요즘은 그를 돌보느라 잘 가지 않았지만 예전엔 집에서 시간이 나면 항상 앉아있던 작업실이다. 그 작업실은 작은 뒤뜰과 이어져 있어 마루에 앉으면 그 안이 전부 내보였다.
이츠키는 신발도 신지 않고 그 뜰에 발을 내렸다. 봄이면 따뜻한 계절풍 아래 꽃이 한가득 피어나고 여름엔 장대비와 뜨거운 햇살이, 가을엔 한쪽에 심어둔 나무에 열매가 열리며 겨울이 되면 많이 크지 않은 눈사람 하나 정도는 만들 눈이 쌓이기도 한다. 그곳을 카게히라를 안은 채 빙 돌며 그가 적당하다고 할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내 여기 내려도. 억수로 따시네.”
“그늘이지지 않는 곳이다.”
“스승님 작업하는 책상도 보인데이. 내는 여기가 좋다. 따뜻하구 스승님도 잘 보이구.”
마른 흙바닥에 앉아 햇볕을 쬐는 얼굴이 새하얗다. 그 얼굴은 어느 꽃보다도 해사하게 웃음을 피우고 있어 이츠키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 하고 싶지만 안 했던 말과, 그가 듣고 싶어 하지만 하지 않은 말이 봇물 터지듯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아는 것처럼, 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지 다 아는 얼굴로. 카게히라는 자신을 봄처럼 보았다.
“…사랑한다, 카게히라.”
“참말이가. 내도 그런데.”
“네가 이겼구나. 아무리 쏟아내도 이 덧없는 감정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질 않아……. 너를 보내고 나서도 더 굵은 물줄기가 되어 흐를 것 같단 게야.”
선선한 바람이 나무를 치고 들어와 잎들이 우는 것처럼 서로 스쳤다. 그 소리에 묻혀 카게히라의 몸에선 끊임없이 가지가 뻗어 나와 노란 꽃을 한가득 피우고 새파란 잎을 틔웠다. 그가 평생을 부끄러워했던 두 눈에서도 생명이 터져 올라 이젠 노란 꽃만을 달고 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바들바들 떨던 카게히라가 겨우 입을 뻐끔거리다 말을 해냈다.
“…스승님, 이츠키, 슈… 내는, 스승님의 인형이라 참말로, 행복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기적인 기다. 역시, 스승, 님…은…….”
속에선 안 된다고, 이렇게 끝을 맺을 순 없다고 오열하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카게히라만은 이런 추악한 자신을 여전히 기적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차마 그런 꼴을 보일 순 없었다. 그가 더 이상 보고 들을 수 없다 해도. 이츠키는 그저 팔을 벌려 그를 한가득 안았다. 새롭게 피어나는 가지들이 이츠키의 옷을 찢고 피부를 긁어 상처를 내도 떨어지지 않고 그가 피어나는 동안 곁을 지켰다.
“내 기적은 너였던 것을, 카게히라. 나의 카게히라… 미카.”
바람이 멎고 소란스러운 소음들이 모두 멈춰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때가 오자 이츠키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앞에는 수줍게 태어난 작은 개나리 나무 한그루가 만개해 있었다. 노랗고 수수한 꽃이 마치 카게히라처럼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난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 나무를 가만히 보고 있는 그의 눈에 뜰 구석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산 채로 걷는 것 같지가 않다.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게 아닌 것처럼 감각이 이상하다. 그렇게 그 앞에 다다랐을 때, 이츠키는 결국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지난여름에 강한 비바람으로 날아가 버린 풍경이, 거기 수풀 사이에 얌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수많은 후회 중에 하나를 주워 담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츠키는 얼른 그것을 집어 들어 원래 있던 자리에 달아두었다. 다만 이번엔 강한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게 단단하게 매어 고정시켜 둔 채다.
다시 개나리나무 옆에 서서 달아둔 풍경을 올려다보았다. 어디선가 먼 곳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에 딸랑, 하고 풍경이 울었다. 옆에선 개나리나무가 웃는 것처럼 가지를 흔들어대며 사근 거렸다. 완연한 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