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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st a little story

Original Story

 

 

1. 

  소복이 쌓였었던 눈은, 언제 내렸냐는 듯이 흙 속으로 스며들었고 산 너머로 커다란 해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렇다고 한기 또한 같이 물러난 건 아닌지라 아침에는 으슬으슬 추워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난로에 땔감을 몇 개 더 넣는다. 후우ㅡ, 하고 구멍이 뚫린 긴 막대기로 산소를 공급해주니 불씨가 살아나는 듯싶다. 어느 정도 불어준 뒤, 난로 옆에 둔 부채를 써서 덥다고 느낄 정도로 열심히 바람을 만드니 불씨가 살아났다. 작고 붉은 불씨는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를 내며 다시 타올랐다. 그런 난로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시간을 보고는 놀라서 빠르게 욕실로 들어갔다. 

 

2. 

  꽃샘추위 덕에 3월 후반에 들어섰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찬 바람이 불어왔다.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 얼마 전에 상추를 파종한 밭으로 갔다. 1주 전에 심은 거라 이제 떡잎이 올라오고 있었다. 작은 잎사귀들이 줄지어 옹기종기 피어있는 걸 보니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해마다 심고 거두는 일을 반복하지만, 그때마다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뒤를 돌아 대파를 심은 것도 보았다. 대파는 파종하고 1달 뒤에 싹이 올라오기 때문에, 지금은 당연히 싹이 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약간의 인내심이 필요한데, 그마저도 하루하루 지나면 인내심은 진즉에 사라지고 바빠진 일상으로 잊히게 된다. 봄은 여러 가지로 분주한 계절인지라, 싹 하나 나는 걸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이다. 그 외에 청경채, 열무, 감자 등을 심어 놓은 쪽으로 이동했다. 싹은 자랐는지, 흙의 상태는 괜찮은지, 감자의 경우에는 뿌리덮개로 덮어둔 곳의 비닐이 찢어지진 않았는지 확인한다. 밭에 심어둔 것은 그럭저럭 잘 있는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쭉 편다. 오늘따라 하늘이 더 푸른 느낌이 들었다. 

 

3. 

  꽃 피는 봄이 오면, 늘 그랬듯이 산속으로 올라간다. 바람이 좀 선선히 불지만 내려오는 햇빛은 따사롭다. 지금 같은 시기에는 산나물이 한 번에 나오는 시기라서 이때 아니면 먹지 못하는 산나물이 몇 있다. 맛도 맛이지만 시기를 놓쳐버리면 풀이 억세져서 먹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올라가다 보니 방풍나물들이 피어있었다. 방풍나물은 풍을 막아주는 효능이 있다고 해서 방풍나물이라고 이름이 지어졌다. 줄기 부분부터 따서 먹는데, 밀가루에 묻혀서 튀겨먹는 것도 맛있지만, 장아찌로 해 먹는 것도 좋다. 장아찌로 해두면 새콤하면서도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다. 물론, 그전에 새콤한 그 맛이 입맛을 돋게 해줘서 장기보존을 하기 전에 먹어버리는 게 다반사지만. 어느 정도 채취한 거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더 걸어갔다. 이제 막 새순이 돋아나는 나무들도 있으면, 사시사철 내내 푸른 나무들도 있어서 빈틈이 있는 듯하면서도 없는 것 같다. 좀 더 걷다 보니 머위가 보인다. 머위는 특유의 쌉싸름한 맛에 봄마다 먹었다. 머위도 역시 튀겨먹어도 맛있지만, 된장이나 고추장에 무쳐 먹으면 쓴맛과 짠맛이 어우러져서 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다 먹게 된다. 하지만 제일 자주 먹는 것은 머위꽃으로 만든 머위 된장. 된장과 설탕, 청주를 섞어준 뒤, 머위꽃을 잘게 썰고 섞어서 밥이랑 먹으면 머위처럼 한 그릇은 빠르게 해치울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된장국이 먹고 싶을 땐 머위 된장에 뜨거운 물을 부으면 된장국과 비슷한 맛이 나는 게 나와서 간단하게 먹을 수도 있다. 꽤 오랫동안 걸어 올라가니 두릅나무가 있었다. 두릅나무는 두릅나무 위에 순이 돋았을 때 똑똑 따서 먹는다. 보통은 5~10cm 자랐을 때 따서 먹는다. 여러 번 말했듯이 튀겨먹으면 맛있지만, 보통은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게 보편적이다. 두릅나물은 시기를 놓치면 억세지고 가시가 자라 먹지 못한다. 그렇기에 봄에만 먹을 수 있는 나물이라 귀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 시기를 놓치면 다음 해까지 영영 못 먹는 건 아니다. 두릅나무의 묘목을 사서 키우면 매해 집 앞에서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재배한 것보다는 자연 속에서 찾은 두릅나물이 더 신선하고 맛있다. 

  봄에는 밭을 일구어 파종하거나 묘목을 심기에 바쁘기도 하지만 나물을 따러 가기 때문에 바쁜 것도 있다. 이 시기 아니면 맛을 볼 수 없는 나물도 있지만, 갓 땅에서 나온 나물은 잎사귀가 부드럽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아찌로 담가 먹으면 1년 내내 먹을 수 있으니, 겨우내 먹기 딱 좋다. 내려가는 길에 나물을 담은 비닐봉지가 묵직했다. 이렇게 많이 따도, 데쳐 먹고, 담가 먹고, 튀겨먹으면 금세 사라진다. 어찌 보면 채취해온 양의 비해 먹는 양이 줄어드는 듯싶지만, 이때 아니면 먹지 못하는 맛이라 그러려니 하고 만다. 

 

4. 

  일과를 마치면 더러워진 몸을 씻기 위해 더운물로 샤워를 한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여름날에도 더운물로 씻는다. 가끔은 정말 견디지 못할 정도로 너무 더워서 찬물로 씻는 경우도 있지만 웬만해서는 더운물로 씻는다. 그래야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낸 기분이 든다. 다 씻고 난 뒤에는 만들어둔 복숭아 청을 꺼내 물에 타서 먹는다. 달콤하면서도 아삭아삭 입에서 씹히는 과육을 맛보며 먹다 보면 금방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겨울에는 따뜻한 생강차를 마신다. 뜨거우니 천천히 집에 있는 책을 보며 한 모금씩 마신다. 

  가끔은 거북 마을에서의 생활이 떠오른다. 여기처럼 조용하고 소소한 즐거움이 있는 곳이 아니라, 북적북적했고, 밤마다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곳이었다. 그사이에 껴서 웃으면서 다른 이들과 대화를 했던 것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간다. 서로에게 화관을 만들어 씌워주고, 높게 뜬 달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누군가 처음 시작한 어설픈 뜨개질에 사람들이 모여 서로 뜨개질을 알려주고 장난치고, 정월 대보름 때는 모두 모여서 달님을 보고 소원을 빌었다. 벌써 그것도 1년이나 지났구나. 시간 참 빠르네. 추억을 곱씹어보니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즐거운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가다가 마을을 떠난 날까지 도달했다. 이리저리 한 마을에 정착하지 못하고 돌아다니다가 여기, 거북 마을에 왔을 때 왔을 때, 아 드디어 정착할 수 있겠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하고, 먼저 다가섰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속 한편에 내가 계속 이곳에 머물러도 되는 건가, 라는 생각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생각은 빠르게 자라나서 머릿속을 좀 먹었다. 혹시나 내가 마을에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마을 사람들이 나를 불편해하는 건 아닌지. 매일 밤 그 고민은 점점 커지더니 어느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삼켜버렸다. 그 후는, 뜨문뜨문 기억이 난다. 정확히는 앞과 뒤 빼고는 중간이 텅 빈 상태다. 어떤 정신으로 짐을 싸고, 물건을 옮겼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 차려보니 이미 다른 마을에 와서 짐을 풀고 있었다. 짐을 풀어 정리하고도 한 동안은 멍한 채로 지냈다. 밤마다 끊임없이 고민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무엇 때문에 내가 그곳을 도망치듯이 빠져나왔을까. 촌장님께, 마을 사람들께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죄를 지은 사람처럼 급하게 나온 게 미안할 뿐이었다. 

  마을은 변함이 없었다. 늘 활기찼고, 따뜻했으며, 나를 반겼다. 변하고 있었던 건 나였다. 

 

5.

  아침 해는 어김없이 떴다. 이불 위에서 일어나 밤사이에 식어버린 찬 공기를 마시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난로에 불을 피웠다. 공기가 어느 정도 따뜻해지니 움직일 만 해졌다. 주전자에 물을 올려놓는다. 변한 것 없는, 변하지 않는 아침 풍경을 보 왜인지 모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변하지 않은 그 마을이 변해서 나 혼자 제자리걸음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두려워서 뛰쳐나온 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느릿한 걸음으로 흘러가는, 이름에서조차 ‘거북’ 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정도로 여유로운 마을을,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제는 떠난 지 오래되어서 돌아갈 수-돌아갈 마음도 없지만-없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 기억들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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