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riginal Story
자그마한 창을 내다보던 사람이 한숨을 푹 쉬었다. 싸늘한 바람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새 열어둔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좁은 방이 시릴듯한 한기로 가득 찼다. 구불구불한 머리끝을 배배 꼬던 사람은 결국 입가로 두 손을 모아 연신 따뜻한 숨을 불어넣었다. 칙칙한 방과 어울리지 않는 분홍빛 머리카락은 목덜미에도 닿지 않을 만큼 짧았다.
아무래도 이 치들은 저를 얼려 죽일 모양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운 미간을 구겼다. 또렷한 연초록 눈동자에는 불만과 함께 약간의 좌절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곳을 벗어날 방법 따윈 없었다. 아니, 적어도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했다. 시체가 되어 나가면 된다. 그편이 가장 빠르고 간단했다. 조금 우울해진 그녀는 애꿎은 종이에 성난 볼펜 자국을 남겼다.
그녀는 다소 덜 건전하고 사나운 단체,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떤 마피아 조직에 잡혀 온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생애를 이곳에서 보냈기 때문에 이제 본래의 삶은 거의 희미해졌다. 이제 남은 기억은 몇 없는데 그 시작은 반드시 어떤 남자와 함께 있는 어린 자신의 모습이었다. 저와 닮은 콧대를 가진 남자는 빛바랜 금발을 어색하게 쓸어넘기며 웃곤 했었다…….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지금이었다. 이대로라면 그들이 요구한 새 설계도를 완성하기도 전에 얼어 죽을 것 같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로마의 겨울이 영상을 유지한다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누구든 좋으니 사람이 오면 실컷 따지고 뭐든 요구할 셈이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알로!”
경쾌한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하게 울렸다. 누구지? 그녀는 의혹에 사로잡혔다. 저렇게 그늘 한 점 없이 밝게 인사하는 사람 따위 이곳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 상대방은 당연하다는 듯이 초면인 저에게 인사를 하고 있지 않은가?
“누구? 아니, 애초에 여기에 어떻게 들어온 거죠?”
그는 엉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확 튀는 민트색에 샛노란 브릿지까지 넣은 머리를 헬멧처럼 다듬어 기르고 있었다. 눈동자는 예의 그 ‘헬멧 머리’에 덮여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언뜻 붉은 안광이 반짝였다. 이런 사람은 아마 이탈리아 전역을 통틀어도 보기 힘들 터였다. 이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당신이 넬라 피오레죠?”
“어… 그렇긴 한데…….”
이제는 명백하게 당황했다. 상대는 제 이름을 –심지어 성까지- 정확히 발음했다. 일반인 같은 외형은 둘째치고 이곳 태생도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이 살벌한 마피아 조직의 감옥 같은 쪽방을 찾아낸 걸까.
“괜찮다면 말 편하게 해도 될까. 스물처럼 보였다면 실망이겠지만, 이래 봬도 훨~씬 나이가 많아서!★”
기가 막혔다. 상큼하게 브이까지 선보인 남자는 뭐가 그리 웃긴지 깔깔 웃었다. 그러다가 충격적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졌다.
“폭탄에 관한 거라면 뭐든 마스터라며? 설계나 제작은 기본이고 처음 보는 종류도 곧잘 해체한다던데. 넬라. 너를 스카웃하기로 했어. 이제 여긴 작별이야. 나가자. 날 따라와.”
“……아?”
그녀, 아니 넬라는 멍청하리만치 한심한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상대는 제 이름도 알려주지 않은 주제에 자신이 제가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굴레를 풀었노라고 말했다. 그토록 간절했던 자유를, 이리도 쉽게 되찾아주겠다고 선언했다.
정말 믿어도 좋을까?
넬라는 상대가 겨울바람 휘몰아치듯 재촉하자 얼떨결에 짐을 쌌다. 그러자 그가 만족한 얼굴을 하더니 이번에는 짐 가방을 둘러멘 그녀를 덥석 붙잡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저가 이곳에 갇힌 이후로 단 한 번도 이유 없이 나와본 적 없는 쪽방이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방을 간단히 빠져나온 넬라는, 나선형 계단을 뱅글뱅글 올라가면서 또 하나 이상한 점을 깨닫고 의문에 빠졌다. 늘 사나운 얼굴로 곳곳을 지키던 조직원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뺨이 세로로 길게 찢긴 흉터를 지닌 사내가 입구에 서 있긴 했다. 문지기는 상대의 얼굴을 보더니 눈썹을 꿈틀했으나, 마지 못해 길을 비켜주었다. 요란한 머리 색의 남자가 왼쪽 눈을 찡긋하더니 아직도 혼란스러운 넬라를 붙들고 커다란 문을 열어젖혔다. 아……. 그 순 초록빛 눈동자가 겨울 하늘을 가득 담았다.
제 의지로는 결코 나올 수 없던 바깥세상이었다. 이곳에 갇힌 햇수도 헤아릴 수 없었고, 똑같은 계절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이제 와서 이렇듯 갑자기 자유를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넬라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신선한 공기에 어느덧 부드러운 내음이 섞여들었다. 저 깊은 지하에서는 맡을 수 없었던 향이었다. 잠든 신록이 눈 뜨고 꽃망울 터뜨릴 계절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느긋한 햇살이 지상에 드리워진 오후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은 저를 끌고 나온 남자의 머리칼을 닮아 있었다. 새삼 상대를 쳐다보았다. 뻔뻔한 미소가 옅은 햇볕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어쩌면 저 위에서 내려온 천사가 아닐까. 저 하늘과 태양을 닮은 머리카락의 남자. 그가 예고도 없이 희망 없던 자신에게 빛을 내려주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더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지금은 이 신선한 공기만으로도 모든 것을 긍정하기로 했다.
“정말 날 스카웃했다면, 앞으로 내가 섬길 보스의 이름 정도는 알려줘야 예의 아닌가요?”
“그런 거창한 호칭은 필요 없고. 수한 오빠라고 불러줘!”
언뜻 방정맞은 대꾸에도 넬라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피어났다. 아주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온기였다. 그것은 그녀의 조각난 기억 사이에 숨겨진 따스한 미소와도 닮아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처럼 연둣빛 잎이 고개를 내밀고, 머리카락을 닮은 분홍 꽃이 만개할 날도 머지않은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