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 럼
* 가상의 시대와 장소를 배경으로 하는 AU로, 쓰인 단어와 사건들은 현실과 무관합니다.
이츠키 가문의 도련님은 어릴 시절부터 예민했더란다. 하녀들 옷차림 하나 흐트러지는 꼴을 못 보고 작은 발로 마룻바닥을 울려가며 다가가 호통을 치거나, 정원에 잘못 잘린 나뭇가지 하나가 눈에 띄면 그것이 신경 쓰여 몇 시간이고 정원을 노려보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 작고 귀찮은 도련님은 무언가 하나 맘에 들면 하루온종일 그것에 빠져 조용했으니 고용인들은 다른 집 도련님들보다는 훨씬 낫다 하곤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양에서 온 인형이라 하면 쓴 차를 마시며 어른인 척 점잔을 떨다가도 후다닥 달려가 대문부터 그것을 받아들고 인사조차 잊는, 참으로 귀엽기 짝이 없는 도련님이었던 것이다.
조신하게 행동하라고 귀에 못이 박혔을 그의 누이보다도 훨씬 얌전했던 그 도련님은 피부가 희고 가녀린 풍채를 해 커가며 집안에서 걱정이 워낙 많았다. 언제든 찌르고 들어갈 수 있는 날카로운 성격조차 그대로 자라나, 또래의 도련님들과는 영 함께 지내지를 못했다. 딱 한명, 키류 가의 아드님과는 잘 지내는 듯 보였으나 실제론 그 집 마님하고 대화를 더 많이 하는 모양이었다.
이렇듯 조용한 문제가 많은 도련님이 나아지는 기색 없이 인형만 들여다보며 살고, 심지어 그 옷에 손수 자수를 놓는 취미를 붙여도 집안 어른들은 내키지 않는 표정만 지어보일 뿐 호통을 치지는 않았다. 그나마 아직 아들에게 작위를 물려주지 않은 공작 어르신이 가끔 불러 자근자근 무어라 하였다지만 둥근 얼굴은 변화 하나 없이 예, 할아버님, 하는 무미건조한 대답만 내려두곤 제 인생을 마저 챙겼다.
“도련님, 어디 가십니까?”
“류군에게.”
키류 도련님은 후작님이랑…, 대꾸를 하려는 새로 온 하인의 손을 집사가 툭 쳤다. 눈치 없이는 오래 버티지도 못할 일이다. 집사가 보내는 신호를 살피며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듯이 헛기침을 하는 사이에 도련님은 벌써 대문 바깥으로 나섰다. 무게 잡는 다람쥐 같은 걸음이 한결 더 포르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도련님은 집안을 나오며 입가에 웃음을 드리웠다. 귀족 된 자, 아무 곳에서나 가볍게 웃음을 흘려선 안 된다지만, 이 길가에는 사람이 없으니 상관없지. 이미 키류에게 그의 아버지와 함께 집을 비운다는 말을 며칠 전에 들은 터다.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인력거를 타도 상관없을 테지만 그런 것보다는 거닐고 걸으며 가는 것이 더 좋다. 그러니 제 집안 어른들이 먼 곳에 가는 걸음엔 아무리 채근을 해도 따라 나서질 않는다.
그러나 키류 부인이 있는 곳이라면.
“…….”
그런 설렘 가득해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누구 하나 지나가지 않는 길에 뚜껑 열린 깡통을 하나 두고 아이가 하나 앉아있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을, 오히려 더 먼 곳으로 돌아 최대한 피해 갔을 것을. 한껏 더러워진 채 덥수룩한 머리를 한 아이가 오다 멈춘 발소리에 고개를 힘없이 굴려 말끔한 옷자락 아래를 본다. 그리고 한참 거기서 더 올라오지 않는다. 아마 전날 함부로 얼굴을 쳐다보았다고 얻어맞은 탓이다.
뭔가를 던져주려나, 아니면 말려나. 그것이 정해지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그렇게 한참을 갑자기 목적지를 잃은 것처럼 서있는 잘 닦인 구두를 보다 도로 고개를 수그렸다. 오늘도 빈 깡통을 들고 빌어먹을 인생이나 탓해야 할 처지다. 몸져 누워있는 여동생의 몫까지 톡톡히 벌어 와야 할 것이라고 윽박지르면 어쩔 건가. 잘 벌리는 구역은 아이보다 크고 힘 있는 아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것을.
“…날이야, 참말 좋다.”
햇빛을 쏘이며 눈을 감았다. 그래도 이런 날엔 다행히 몸이 시리지는 않는다. 제가 매달릴 생각이 없는 줄 알았는지 오던 도련님이 가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 다시 멈춰서고, 제 앞에서. 앞머리를 부드럽게 넘기는 손길에 아이가 후다닥 놀라 눈을 뜨고 손을 쳐냈다. 아이고, 어제만 맞을 팔자는 아니었나보지. 사과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머리를 먼저 조아려야 하는지 눈치를 살피다 눈이 마주쳤다. 내일 참, 변사체로 발견될 날인가보다.
“예쁘군.”
“…죄, 죄송, ……예?”
“누가 이런 것을 길바닥에 두었는지, 아름다움이라고는 한 치도 모르는 자다. 그것보단 아마 신의 실수인가. 인형으로 태어났더라면 내 방에 두고 예뻐해 주었을 것을.”
다시 한걸음 더 다가와 머리를 거둬내고 가려져있던 한눈을 마저 드러나게 만들더니 온화했던 표정을 굳힌다. 이번에는 진짜 맞는다. 기분 나쁘게 했을 게 당연하니. 아이가 눈을 질끈 감는다. 아무리 이렇게 생긴 눈이라도 잘못 맞아 못 쓰게 되는 것은 싫었다.
“…눈 하나가 잘못 끼워졌군.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
“상관없다. 이름이 뭐냐, 계집.”
“………니더.”
슬금슬금 뒤로 더 물러나 도련님의 손에서 벗어난다. 다행히 더 다가올 생각은 없어 보인다. 아이는 그대로 벽을 짚고 일어나 제대로 뒷걸음질을 쳤다. 허리를 굽힌 채 있던 도련님도 몸을 제대로 펴고 제가 했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 인상을 조금 찡그리고 뭐, 하는 입모양을 해온다.
“내는 계집아 아입니더!”
아이는 그대로 달음박질을 쳐 도망갔다. 도련님도 그렇게 오래 그 자리에서 그 아이가 돌아오길 기다리지는 않았다. 조만간 다시 올 것을 알았더라도. 그저 가던 걸음을 마저 닦달해 사랑해마지 않는 여인을 만나러 갔다.
도련님은 이 일을 오래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종종 또 이 길을 지나가며 이상하게 뭔가 있었던 것만 같은 자리를 습관적으로 응시는 하겠지만. 그리고 그것은 아이도 마찬가지다. 빈 깡통이라도 챙기지 않으면 뼈도 못 추릴 것을 알아 돌아온 자리에 지폐 뭉치와 종이로 예쁘게 포장되어 있는 사탕 두어 개가 들어있었던 순간은 시간이 지나가며 함께 흘러가 버렸다.
영원하지 않은 친절과 부유, 달콤함. 다만 도련님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었고, 아이는 잠깐이나마 그것을 움켜잡기 위해선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시대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일어설 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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斎宮 宗 - 影片 みか
[격변기(激變期); 상황 따위가
갑자기 심하게 변하는 시기]
(럼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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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年後
이츠키는 셔츠의 깃을 단단히 여민 채 모자를 눌러 쓰고 걸음을 빨리 했다. 길의 모퉁이를 여러 번 지나면 지금 저를 쫓아오는 이들도 여러 갈래로 흩어져 우왕좌왕하게 될 것이다. 확신은 없다. 그랬으면 한다는 것뿐이지. 옷 안에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드모아젤을 놓치지 않게 꼭 붙들고 머릿속으로는 이 곳의 구조를 생각했다. 짧은 길 하나라도 잘못 들어섰다간 계획이 틀어진다.
“거 얼굴 좀 보자는 데 왜 이러시오? 잠깐 확인 좀 하자니까, 선생.”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왼쪽, 왼쪽, 오른쪽…, 조금 더 가다가 다시 왼쪽. 확실히 점점 따르는 걸음의 소리가 작아진다. 작은 걸음들이 사방에서 들리긴 했지만 자기들끼리 마주치고 봤느냐, 못 봤느냐 하는 얘기를 하며 시간낭비를 해대고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여기서 빠져나가 조금만 가면 인력거들이 대기하는 곳이 있다. 그런 것을 타기에도 불안하지만 제 다리로 영영 따돌릴 수는 없으니 방도가 없다.
새까만 구두에 먼지가 나앉아 엉망이다. 그런 것에 신경 쓸 틈 없이 달려 겨우 지나가는 빈 인력거를 하나 붙들어 올랐다. 숨이 차 어지러운 와중에도 멈춰서있을 수는 없어 계속 가달라 손짓을 한다. 인력거꾼은 이상할 법도 한 그 행동에도 별 다른 토 없이 출발한다. 이마를 짚고 올라오는 현기증을 가라앉히는 이츠키의 눈에 바닥을 달리는 흰 발목이 자꾸만 밟힌다.
“어디로 모실까예.”
“잠깐만… 이대로 계속 가라.”
“쫓기는 깁니꺼?”
“네 알게 아니다.”
이츠키는 옷 안에서 마드모아젤을 꺼내 보며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도로 품에 소중히 안았다. 그동안도 인력거의 바퀴는 계속 굴러간다. 아득히 멀리서 제기랄, 빌어먹을, 하는 천박한 욕설들이 오가면서도 쫓아오는 소리는 없다. 개중에 하나는 예상을 할 법도 한데 역시 멍청한 무리에서 잘나봤자… 한숨처럼 이츠키가 웃었다.
“갈 곳을 못 정한 깁니꺼? 그라믄 좋은 곳을 알지예.”
“…….”
“도련님을… 애타게 찾는 곳.”
이츠키의 입가가 금세 굳었다. 저것이 방금 무어라 하였는가? 숨마저 멈추고 이 모든 상황을 냉정하게 머릿속으로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오래 그러고 있을 순 없었다. 다음, 다음 일을 생각해야해, 다음 일을. 가벼운 사투리를 구사하는 저와 비슷한 또래의 소년이 고개를 슬쩍 돌려 웃어보였다. 그러더니 바라본 방향으로 꺾어 들어간다. 대낮인데도 어두운 골목이다.
“슈군, 진정하렴, 진정해…….”
“갑자기 여자목소리맹키로 뭐라 카는 기고? 참말로 요상한 사람이데이. 얌전히나 있어라!”
“…….”
정말 조용해진 뒤를 두고 소년은 말도 잘 듣네, 하더라. 그러나 이츠키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고, 눈으로는 들어오는 길목, 길목을 살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딱 좋은 때를 맞이한 것처럼 마드모아젤의 허리를 꽉 붙들었다. 그녀의 작고 예쁜 실크모자가 벗겨질까 그것을 내려 주머니 깊이 밀어 넣고 그녀를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제 모자를 지그시 누른다. 앞에서 달리고 있는 소년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 갈 길을 달리고 있고.
바퀴가 땅을 딛는다. 어느 한 곳도 오래 멎어있는 법 없이. 누에고치 끝을 달아두면 커다란 실패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결실처럼 소년의 땀방울이 툭, 옷에 떨어져 둥근 자국이 남는 것을 보며 이츠키는 뛰어내렸다. 오늘이 올 때까지 자신이 이런 것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하…! 이 도련님 좀 보소, 거기 안 서나!”
처음 바닥에 발이 닿았을 땐 무릎이 절로 굽혀졌다. 그대로 바닥에 구르며 꼴사나운 모습으로 붙들릴 수도 있었지만 전자도, 후자도 싫다. 그나마 전자보단 후자가 더 최악이니 한쪽 바짓단을 희생하고서 일어나 다음 걸음을 내딛었다. 잠시 충격으로 발목이 시큰거리고는 있으나 가다보면 나아질 것이다. 앉을 수 있으면 더 좋을 테고. 그리 오래가지 않아 가능할 것이다. 일부러 소년의 숨이 목 위에까지 차기를 기다렸으니.
저를 애타게 찾는 곳에서 잠시라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틈을 찾았겠지만 불행히도 이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사람 살지도 않는 곳에서 누가 죽었는지 관심이 있는 이가 있을까. 최대한 들어왔던 길 그대로 돌아가 빠져나가야 했다. 큰 골목에서 누가 저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건 어쩔 수 없이 그때 생각하는 수밖에. 독 안에 든 쥐 꼴을 하는 신세라니. 이츠키는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 어디 안전한 곳에 다다르면 제 혀라도 물어 죽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마침내 밝고 큰 길.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숨을 고르고 다시 뛰는 것은 지금으로선 지나치게 시간이 많이 든다. 이 부근이야 다 그렇다지만 어찌 됐든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야 했다. 귀는 밝으니 이상한 발소리라도 들리면 곧바로 숨죽일 수 있는 그런 곳.
“…마! 조용히 가입시더. 좋은 옷에 땀 냄새 베어예!”
그래도 꽤 쫓아오고는 있다. 이 상황에 땀나는 걸 누가 신경이나 쓴다고? 이제 이츠키는 마을의 거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소년이 여기저기 뛰는 소리는 아주 간간히 들려와 자기가 조금이라도 큰 걸음 소리를 내면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곧 산 어귀에 난 길을 찾고서, 그 옆으로 돌아서 들어갔다. 사람 다니는 길로 가면 좀 더 걷기야 낫겠지만 지금은 좋은 길만 따라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걸음을 맞이한 게 오랜만이라는 듯 드문드문 난 잡초에 조차 밟힌 흔적 하나 남겨선 안 된다.
*
터벅터벅. 해가 지고 마침내 느려진 걸음이 풀포기와 흙을 파헤친다. 나무가 좁은 간격으로 나있으면 거기 손을 대어 겨우겨우 나아가고,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진 나무에 가는 동안은 그렇게 힘겨울 수가 없이 비틀거렸다. 시큰거리던 발목이 이제는 떨어져 나갈 것처럼 우악거린다. 아, 나무. 그러다 거리를 잘못 쟀다. 손으로 붙들지 못하고 형편없이 바닥에 엎어져 젖은 땅을 짚었다. 이런 곳에 눕는 것은 싫다. 하지만 더 이상 추악하게 발악하고 싶지도 않아져 이츠키는 그대로 몸을 뉘였다. 코트 안에 꼭 둔 마드모아젤이 말끔하게 웃고 있으니 그걸로 됐다.
“…지쳤구나, 슈군. 괜찮아. 자고 일어나면 나아질 거란다. 내가 여기 있잖니. 자장가 불러줄까?”
자장자장, 데굴데굴, 데구르르……. 그 뒤로 입을 다물었다. 아니, 입술을 꽉 물고 파르르 떨어댔다. 정신없이 떴는지 감았는지 인식도 안 되고 있던 눈을 부릅뜨고 마드모아젤을 다독이던 손을 쥐어 온 신경을 다시 일깨운다. 발목의 고통이 더 생생해지는 와중에 목에는 피가 끓었다. 할 수 있다면 몸에서 이 뜨거운 것들이 터져 나올 때까지 고함을 칠 텐데. 이츠키는 그토록 분노하고 있었다.
왕이 바뀐다고 하더라. 권력구조가 재조직 되고, 세상이 뒤집힌다고. 아니, 왕이 아니라고 하던데. 그런 말을 수군거리는 것들은 죄다 모아 매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지만 이츠키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아랫것들이 또 허망한 소문에 들떴나보다 싶었지. 사실 그런 것에만 무심한 것이 아니었다. 서양에서 들여온 도자기 인형이라면 사족을 못 쓰면서도 물건과 함께 올 사상이라는 바람엔 영 눈 뜰 줄을 몰랐다. 귀한 집 도련님이야 어쩌든 야금야금 계절풍에 세상은 변해갔다.
그가 번쩍 정신을 차린 것은 밤중에 제 창을 두드리는 소꿉친구의 기척이었다. 잇쨩, 잇쨩, 다급하게 옛 애칭으로 부르는 소리와 잠에서 깨어나 짜증스럽게 창문을 연 이츠키는 그 눈을 본 순간 영원처럼 오랜 시간 작별을 해야 하는 것을 깨달았다. 키류는 자신과 맞는 부분보다 맞지 않는 부분이 더 많은 이였다. 무술에 관심이 많아 몸의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는 해가 갈수록 다부진 몸을 갖춰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흔들리고 있다. 뒤늦게야 여동생의 손을 붙들고 있는 것도 알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더라. 그는 이츠키의 방 안에 혼란을 내려둔 채 그럼, 하는 말로 모든 것을 정리했다. 그래…, 떨떠름하게 대답하고서 그 날 밤은 더 잠들지 않았다. 그러나 아침 해가 뜨자마자 들리는 비명소리에도 깨어난 척을 하지 않았다. 키류 후작가는 그 날 영영 사라졌다. 저녁에 하인들의 만류에도 집 밖으로 나선 이츠키는 자신이 온 마음을 다하던 여인이 죽은 것을 보았다.
그 뒤로 쭉 뒤숭숭했다. 집안 어른들은 더 이상 여유를 갖고 있지 않은 채 매일 불안에 떨며 여기저기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고, 온종일 전화를 붙들고, 어떤 날엔 누군가에게 사정을 했다. 이츠키는 그 꼴이 보기가 싫어 방 안에 틀어박혔다. 그쯤에 그녀를 닮게 생긴 인형을 진열장에서 꺼내 혼잣말을 시작했다.
슈군, 귀족이란 어떤 때라도 품위를 잃어선 안 된단다. …그래, 맞다, 마드모아젤.
“……님! ………이소!”
누워서 화를 억누르고 있던 이츠키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나무를 짚고 서서 걸음을 옮기려다, 풀썩, 다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잠깐 쉰 사이에 삔 발목이 퉁퉁 부어 통증으로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이츠키는 그것을 오냐오냐 받아줄 형편이 안 되었다. 한쪽 다리로 앞서 나아가고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점점 더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어둠에 눈이 먼 것만 같았다.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여전히 시야는 갑갑하다. 보이는 게 없으니 마음은 더 조급함에 끓었다. 그의 조부는 눈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 그러니 안경이 들어왔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기뻤을 때라고 했지. 조부는 종종 이츠키를 불러다 걱정 어린 호통을 치고, 그 호통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에게 마지막엔 항상 웃어보였다. 나약하게 생긴 녀석이 흔들리지 않고 고고하게 자신을 지키는 것만은 봐줄만 하다면서. 이츠키는 그런 조부를 좋아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 포기해도 귀찮도록 잔소리를 해대는 사람이었지만, 어디 멀리 나갔다 올 적엔 꼭 그를 위한 인형을 사다주는 상냥한 이였으니.
“……!”
한참을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나아가다보니 목소리도,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츠키는 돌아보려다 말고 눈살을 찌푸려 고작 앞의 시야를 선명하게 했다. 다 쓰러져가는 폐허 같은 집이 겨우겨우 서있는 게 가까스로 보여, 이를 악물고 아픈 발목에도 일할 것을 명령했다. 아마 아까 빠져나온 마을에 사람들이 살적에, 그 곳에 있던 나무꾼이 올라와 쉬던 곳일 테다.
쫓아오던 놈도 이쯤이면 포기하고 돌아갈 때가 되었지. 더군다나 이 어두운 통에 자신을 찾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 테고. 다만 확실하게 해서 나쁠 것이 없으니 이츠키는 그 근처 수풀에 몸을 숨기고 아픈 신음을 참아냈다. 달달 외우고 있는 시 몇 개만 지나가면 곧장 들어가 추위도 조금이나마 피하고 제대로 마른 곳에 몸을 뉘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통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첫 구절도, 마지막 구절도. 늙은 조부의 손이 제 손을 아직도 움켜잡고 있는 것 같아 이츠키는 몸을 떨었다. 왜 나에게, 왜 이런 것들을. 짐승들도 깊게 잠든 밤, 고요한 긴장만이 온 산을 뒤덮고 이츠키는 머리가 아팠다. 확실? 지금 살아나간다고 해도 앞은 훨씬 더 불투명하다. 아까 거기서 시체로 발견되나, 여기서 시체로 발견되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렇게 이츠키는 시간을 채 세지도 않고 낡고 힘없는 조그마한 건물 안에 발을 들였다. 지친 몸은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살피지도 못한 채 구석에 가 쓰러져 누웠다. 내일쯤 죽어있고 싶었다.
“……아가야는 착한 아이, 어서어서 잠들어라…….”
마저 자장가나 흥얼거렸다. 마드모아젤의 눈은 감기지 않아 항상 저를 보고 있는 것처럼 또렷했다. 이츠키는 한 팔에 그녀의 머리를 올려두고 계속, 계속 자장가를 불렀다. 당장 생각나는 것이 그것 밖에 없어서.
아가야를… 돌봐주는… 유모는, 어디에 갔지? 저기 저 산을 넘어서, 넘어서, 마을에 갔지. 저 산 넘어, 넘어 마을에서 무엇을 사왔지? 둥, 둥.
“예 있었구먼.”
문이 열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년이 들이닥쳤다. 이츠키는 얼른 주머니를 뒤져 작은 칼을 꺼내 손에 쥐었다. 안았던 마드모아젤은 벽에 기대 세우고 저는 서지 못한 채 앉아 엉거주춤, 숨을 고르고 있는 소년을 응시했다. 끈질기다. 요령 없이 몸밖에 쓸 줄 모르는 미련한 속물.
“하… 참. 그라게 도망가지 말라고 혔제. 어차피 붙들릴 거, 응? 도련님. 꼴이 우습구먼? 나뭇잎이니, 진흙이니 하는 것들 죄다 묻히고서 말이제.”
이츠키는 그와 중에 옷을 털어냈다. 제 머리카락을 보는 시선에 머리카락에 붙은 낙엽도 떨쳐내고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찌나 필요할 때 도와주질 않던지, 구름 뒤에 숨어있던 달이 이제야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입구에 서있던 소년의 얼굴을 잠시 비추었다. 바짝 들려 긴장하고 있던 이츠키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어쩌다 이래 됐나? 곱게만 자랐을 도련님이. ……됐고, 내랑 가입시더. 내는 인형맹키 자란 사람헌티 험한 꼴 봬주고 싶지 않은 기라예. 다친 것도 같구, 내려가는 거 도와줄 테니께… ”
“움직이지 마라.”
이츠키에게 다가서던 걸음이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기분 탓인가, 경계를 하는 게 아니라 조심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좌우를 둘러보던 그가 손을 뻗어 마드모아젤을 도로 제게 가져왔다. 옅은 빛을 반사해 보인 쇠붙이가 칼인 것을 소년이 안 것도, 같은 순간이었다. 이성이 본능을 짓눌렀다. 하지만 감정까지 누르지는 못했다.
“함 거칠게 나가보자 이깁니꺼? 우습네, 참말로 우스워.”
“…큰 소리를 내는 것도 그만둬.”
“아니 내가! 큰 소리를 내는 기도, 당신 말에 따라야 합니꺼? 이래가 귀족이란 사람들은, 부자란 사람들은! 뭐든 지 맘대로 되는 줄만 알제! 억수로 짜증나는 기라. 내는 이제 그런 것에 질렸데이. 정신 차리소, 도련님. 이제는 당신들 세상이 아니다!”
우지끈. 그 소리가 드디어 소년에게도 들렸다. 돌아서 나가야 하나? 하지만 저 사람은 어쩌고. 그 망설이는 순간에 한풀 내려앉은 천장이 빠르게 저에게 가까워졌다. 소년은 눈을 감았다. 무언가 저에게 부딪힌 것만 같은 감각과 함께 정신도 깜빡,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깐 들었던 기분을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다.
*
뭐든, 뭐든 할게예. 아가 죽어간다 안 캅니꺼.
천장에 뭐가 달렸었는지 볼 수도 없었다. 단아한 문양의 천으로 만들어진 부드러운 옷을 붙들고 울며 빌고 있었으니까. 그런 제 위로 돈이 없으면 어쩔 수 없다는 사형 선고만 반복해서 내려지고, 그는 제 목을 매달고 있는 밧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의사를 단단히 잡았다. 놓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이지만 죽는 것은 어린 여동생이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주제에 뭐가 그렇게 귀하다고. 돈이면 자식도 내파는 세상에 뭐가 그렇게 소중하다고.
그 뒤로 여자아이가 와 오빠, 괜찮아, 그랬다. 그 소리에 놀라 돌아본 곳엔 이미 죽은 지 오래되어 파랗게 굳어있는 어린 아이가 있다. 어릴 때부터 워낙 앓기를 자주했지. 이제는 아프지 말고. 살아서도 부드러웠던 적이 없던 앙상한 팔을 붙들고서 울고, 또 울었다. 돌아선 뒤에서 또 다른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새끼손가락을 종이에 베였어요, 좀 봐주세요. 그러자 엄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가냘프게 아, 예, 그래야지요, 했다.
세상 어디에 가서도 가장 아래층의, 더 치일 곳도 없는 바닥에서 평생을 살아온 그가, 처음으로 들쑤시는 분노를 깨닫고 악, 소리를 질렀던 날이다.
“……….”
“……내, 죽었나. 근데 와 이 자슥이랑 같이 있노.”
“…나도 죽어서까지 더러운 속물들과 있고 싶지는 않다. ……아니, 일어나지 마라. 더 누워있는 게 좋을 게야.”
제가 일어나려 하니 손을 들어 이마를 지긋 누른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눈만 깜빡이고 있자니 머리에서 울리는 고통이 서서히 다가온다. 아, 작게 탄식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자신을 빤히 보고 있던 눈이 잠깐 다른 곳에 갔다가 손수건을 가져와 이마에 대어 눌러준다. 몸을 살짝 움츠리다 제 아래 있는 게 찬 바닥이 아닌 것도 알아챈다.
“…내 지금 당신 다리에?!”
“정확히는 내 다리에 덮은 외투 위에 있다.”
“하, 참, 약간 돌아삔 줄 알았더니, 참말로 미친 사람이네.”
“구해준 사람에게 겨우 그 정도 인가? 정말이지, 천한 것들은 어쩔 수가 없다는 게야.”
“뭐, 천 것?!”
그 말에 울컥 화가 치밀어 몸을 일으키다 이는 현기증에 도로 눕는다. 부끄럽기 그지없다.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저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러나 이츠키가 턱을 붙들고 그 얼굴을 다시 저에게 향하게 만들었다. 무안함 속에 달아오른 얼굴 속에서 혀가 꿈틀, 움직여 입천장을 쓸었다.
“…뭘 그렇게 보는 기가. 부담스럽게.”
“이름이 뭐냐.”
“내랑 그런 말할 사입니꺼?”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다시는 이런 것들에게 머리 조아리고 살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들이 바라는 대로는 절대 해주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대답하지 않으면 놓을 일도 없을 거라는 손길에 눈을 데록데록 굴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이건 단지 거래일뿐이야. 이름을 알려주고, 이 시선에서 벗어나는.
“……미카라예.”
“미카? 그게 단가?”
“그라모 그게 끝이제. 제 입으로 천 것이라고 하고서는… 천 것헌티 성이 어데 있습니꺼?”
그는 왜인지 잠시 조용해졌다. 변화 없는 표정이었지만 미카는 그 안으로 제 이름이 스쳐지나갔을 것이라 여겼다. 생각을 여간 싫어하는 탓에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제 턱에서 손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미카는 계속, 그를 올려다보았다. 겨울에 막 녹아 흐르는 냇물처럼 순수하면서, 어딘가 태생적으로 베어 나오는 강압적인 분위기가 서려있는 눈이다.
그가 입 안으로 미카, 하고 발음을 굴렸다. 그러나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은 것에 흔적은 없다. 화들짝 놀라 그제야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투덜거렸다. 뺨에 닿는 공기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혹은, 그 반대거나.
“참말로, 내 이름만 듣고 입 싹 다무는 것 좀 보이소.”
집이 있었다는 것만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로 너덜너덜한 건물은 하늘을 가리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미카는 적막한 위를 올려다보면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가리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 환한 하늘 아래, 자신 위, 그 사이에는 그 남자가 있다.
“너는 내 이름을 안다.”
“…….”
“나를 쫓았지? 텐쇼인이 시켰으렷다. 그러면서 뻔뻔하게도 내게 이름을 묻는구나.”
그 남자는 기분이 나쁠 정도로 말을 툭툭 내뱉었지만 미카는 심상을 뒤트는 대신 그가 어젯밤 다쳐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는 그 다리 위에 저를 눕히고 불편한 기색 하나 없다. 아마 전날에도 그가 낑낑거리며 저를 구해냈을 것이다. 왜?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지 못해 전에는 들어 알았을 이름보다 그 이유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저 마음이 여린 도련님이라 그랬겠지. 옆에서 악몽처럼 쫓아다니는 여동생이 속삭였다. 사람 죽는 모양을 본 적이 없어서 두려운 거야. 험한 꼴이나 보고 살았겠어, 저런 도련님이. 무슨 생각해, 미카 오빠. 설마 너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다 자기만족이야.
그러자 그 남자는 환청 속에 흠칫흠칫 귀를 기울이는 제 얼굴을 붙들고 그것들을 쫓아내었다. 한밤중이고 한낮이고 가리지 않으며 나타나는 그것, 족쇄 같은 감정을.
“나는 이츠키 가문의 차남이자, 제국의 공작, 이츠키 슈. 이 더럽고 천박한 속물들의 세계에서, 마지막까지 숭고할 최귀인이란 게야.”
참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구나, 하고 높아진 콧대 끝을 보다 다시 정신을 잃었다. 누구를 위해서건 상관없다. 그는 자신을 두고 어디에도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곁에선 지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악몽도 그 오만함에 혀를 내두르고 도망갈 것만 같았다.
*
발목에 나무를 대고 옷을 찢어 단단히 고정시켜주었다. 이츠키는 그 꼴이 영 못마땅한 듯 내려다보더니 발목을 살짝 움직여보곤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 미카가 그 모습을 보고 바람 빠지는 소리에 닮게 웃었다.
“움직이지 말라구 대놓은 기를 그래 하믄 우예하노?”
“네가 너무 느슨히 매어둔 탓이다. 아니, 애초에 네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것 아니냐는 게야.”
“도련님 몸에 을마 걸려있는 지나 알고 그래 말하소.”
“흥. 텐쇼인의 개. 깔려 죽게 내버려뒀어야 했다.”
“그라지 와. 그라고 내는 텐쇼인 씨가 뉜지도 몰라예. 기냥 대장이 시켜가지고 쫓아 간기지. 우에 있는 양반들 다 알믄 내가 천 것이겠습니꺼?”
여동생이 죽고 난 후, 길거리에 묘도 없이 멍석에 말린 여동생의 몸뚱이 위로 돈주머니가 툭 떨어졌다. 저걸 굳어가는 주둥이에 넣어서 새 숨이라도 돌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테지만, 이제는 소용없는 것이다. 미카는 거기 앉아 돈주머니를 던진 이도 보지 않고 그것을 도로 집어 뒤로 던졌다. 어디 정착시키지도 못할 것, 강물에 내던지고 저도 거기 뛰어들 생각이었다. 날 때부터 갈 때까지 가진 것 없이 사는 이들은 분노에 던져 태울 것조차 없어 스스로의 몸뚱이를 재물로 받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돈 주머니를 챙기지도 않았고, 오히려 거기에 장작더미를 더 얹어주었다. 그것은 미카가 셀 수 있는 것보다 더 많고, 헤아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아 영원토록 탈 것이었다. 그토록 오래간 타, 결국 제풀에 지쳐 소리도 없이 사라질 작은 불씨들을, 그 사람은 아주 많이 찾아냈다. 두어 걸음 지나 들리는 곡소리 속에도 있을 테니 수요가 생기는 족족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세상을 바꾸자고 그랬더란다. 언제까지 바닥에서 빌빌 기면서 살 것이냐고, 하늘을 땅으로 내리자고. 미카는 그런 것들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이라는 종에 머리를 한번 박으면 그 아래로 떨어져 죽을 작은 새 같은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 남자는 미카의 머리를 땅에 처박는 대신 자신이 작은 새라도 되는 양 가볍게 한번 안아주었을 뿐이다.
그가 자리를 뜨고 미카는 돈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일꾼을 하나 고용해 여동생의 시체를 저도 모르는 땅에 묻도록 하고, 옷을 사 입었다. 그 다음엔 멀쩡한 식사를 제 값으로 사먹고는 자신을 찾아온 다른 남자를 따라 나섰다. 다들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들 안에는 분노가 있었고, 그만큼 슬퍼했고, 뼈저린 자기 연민에 잠겨 있었을 뿐이다.
“말해보이소. 그 ‘텐쇼인’이란 사람이 내의 가장 우에 사람입니꺼? 그런 분이 당신은 왜 찾구? 당신, 못된 사람이제?”
“이름도 모르는 이를 위해 뭘 위한 건지도 모르는 일을 하는 녀석이라 판단하는 가치도 고작 그 정도군.”
“응아아, 당신 지금 내 말 무시하는 기가?! 내 말에 대답을 하란 기다! 혼잣말은.”
“…나는 제대로 답해줬다만.”
“그니께 못된 사람인지, 착한 사람인지, 그걸 물었다!”
이츠키는 이번에야말로 그의 바람대로 대답할 가치도 못 느꼈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제 여인이 여느 때와 같이 웃는 모습으로 자신을 반겨주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품에 꼬옥 안고 몸을 웅크렸다. 조금 있으면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된 이 멍청한 애송이가 사람들을 데려와 저를 데리고 갈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가 저를 업을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지. 그는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을 지키면 되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그의 할아버지도 노력했다고 해주겠지, 저승에서까지 잔소리를 할까. 이츠키는 끝이 다가오는 동안 외로움과 고독안에 파묻히기로 했다. 모가지가 떨어져 바닥에 닿는 것은 싫으니 차라리 독 잔을 달라고 하는 편이 좋을 터다.
그리고 그 애송이가 제 팔을 잡아 올렸다. 이츠키는 아프지 않은 발목의 방향으로 몸을 기울인 채 얼떨떨하게 서서 고개를 돌렸다. 기이하게 서로 다른 색으로 빛나는 눈이 안에 든 것을 그대로 비추면서, 바깥에서 닿아오는 것들 마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마드모아젤과도 같은, 맑은 눈이다.
“마, 대답하기 싫음 마이소. 당신은 몰라두 내는 좋은 사람이 될 테니께. 딱 하루, 당신헌티 빚졌으니께 말이여… 내는 그걸 갚을 거구먼.”
“…….”
“당신이 하루간 도망치는 걸 돕겠다, 이 말이다.”
마치 은밀한 놀이라도 하는 것처럼, 혹은 둘만의 암호를 만드는 것처럼. 즐거운 듯 웃으며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 지도 모르는 이 순수한 악마를, 이츠키는 부수고 싶어졌다. 사람들이 이유 없는 폭력을 휘두르며 기분을 다독이는 것처럼. 그는 이 죄 없는 아이가 단 일 분이라도 그런 짓을 했다가 얻을 대가를 알고 있다. 차라리 무너지는 집의 나무더미에 깔려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맘대로 해라. 나야 손해 볼 것은 없다는 게야.”
하지만 그 더미에서 구한 것도 자신인 주제에 이츠키는 결국 자신의 폭력을 수긍해버렸다. 굳건히 지키고 있던 무언가가 금이 가 위험을 알리는 것도 같았으나 제 주변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안전하다. 게다가 제가 서있는 곳이 지옥인지도 모르고 해맑게 웃으며 옳은 일을 한다고 믿는 이 작은 속물, 이 속물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생각만 해도 조금은 속이 나아지는 것 같았으므로.
그는 가장 추악하게 혐오하며 이 ‘놀이’를 어떻게 이길지 궁리하는 즐거움에 몸을 좀 더 기울였다.
*
아이는 가는 내내 쫑알거렸다. 평소라면 입 좀 다물라고 화를 냈을 테지만 그쯤에 그의 여동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버린 탓에 혀끝을 살짝 물고 말았다. 보통 저런 얘기는 진중한 상대와 나누는 게 아닌가 싶어 속이 복잡하다가도, 생각이란 걸 하지 않는 존재니 만나는 사람마다 해댔을 것이라 대충 짐작이 갔다.
지루하고, 누가 예전부터 써내려둔 것처럼 당연한 결말로 치닫는 이야기. 전통보다 신파에 가까운 그것을 들으며 고개를 돌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저런 영양가도 없는 얘기를 듣느니 말라가는 나무나 겨울에도 떠나지 않는 새의 무리를 구경하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그것마저 깨져버린 것이, 별안간 미카가 멈춰서더니 울어버린 탓이었다.
그리고 이츠키는 보았다. 멈춰 섰을 때, 하늘을 가득 담고 있던 투명한 눈을. 그것은 순수하기 보단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공허해 깨끗한 어둠에 가까웠다. 그 그림자 위로 슬픔이 몰려들어 먹구름이 끼고, 그 아래로 난 하얀 불모지에 비가 내렸다. 이츠키는 그 순간, 어쩌면 생에 마지막으로 보내는 것일 수도 있는 늦가을의 풍경 따위는 마음속에서 내보내버리고 그 땅 위에 손을 얹었다.
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이것을 방에 두고 종일 울게 하고 싶어졌다. 매일매일 한 치도 틀어지지 않은 지루한 이야기를 듣게 되더라도.
“……내는, ”
“됐다. 더 말하지 마라. ……가엾은 것.”
입을 열면 네 아름다움 따위는 허공으로 사라져버릴 테니.
이츠키는 종종 마음에 쏙 드는 인형을 발견하면 그랬다. 몇날 며칠을 차만 마시며 보내다 쓰러지거나, 낮이고 밤이고 미동도 않는 것을 두고 눈물을 흘리거나 웃어댔다. 미쳤다고 누가 소리를 쳐도 듣지 않다가, 계속 그러다간 그것을 부수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때야 부랴부랴 눈을 떼고 방 밖으로 나섰다. 못내 아쉬운 것을 방안에 두고 그는 내내 슬퍼했다. 다시 그것을 마주하면 감동하여 울고, 기쁨에 웃고.
그러나 그것도 순간이었다. 시간이 적당히 흐르고 나면 그는 완벽하지 않다며 그토록 아끼던 것을 바깥으로 내쳤다. 그리 아끼지도 않던 것은 진열장에 두고 가끔 먼지나 털어주거나 하는 것을 보면 그의 마음에 꼭 드는 것이 인형의 입장에선 될게 못 됐다.
그리고 지금, 이츠키는 아주 오랜만에 그런 감각을 깨운 터였다. 그는 스스로가 이성적인 사람이라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마치 안에 담아두고 있던 것을 터트리는 것처럼 지극히 본능적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누가 그것을 일깨워주려고 해도 그는 곧 귀를 막아버렸으니까.
“……도련… ”
“쉬…, 괜찮다.”
걷고 말하고 찬바람을 쏘이느라 발갛게 달은 뺨에 닿는 부드러운 손끝. 이츠키의 달라진 눈빛이 무엇인지 미카는 영 알 수가 없었으나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매 비슷한 반응을 보였으니 그와 비슷한 종류의 것이라 생각했다.
미카는 매일 죽음을 보아왔다. 여동생의 시체가 눈앞에 있는 동안은 그것을 보는 내내 반복됐고, 결국 알지도 못한 곳에 묻고서는 꿈속에서 매일. 햇빛을 쐬면 좋아하고 추우면 움츠러드는 그에게 죽음이란 알 수도 없이 무겁고 어두운 것이라 그는 그것이 마냥 슬펐다. 이제는 제대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매일매일 꿈속에서, 그리고 일어나서는 환각 속에서, 소녀는 스치듯이 본 누군가로 얼굴을 바꿨다.
그렇게 기억은 바라도 감정만은 너무 강렬해 그의 인생에 음각으로 새겨져버린 것이었다. 아무도 그가 그것을 떨치도록 도와주지 않았다. 다만 그것으로 가엾어 하고, 이용하려고 했지. 그렇게 한 번, 두 번 친 망치질이 가슴 속을 깊게 파고 결국엔 뚫어버렸다. 그것이 그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는 것처럼 그를 그 안에 고정시켜둔 채로.
“그림자(影)가 조각(片)이 되어 흐르는 모양 같구나, ……카게히라.”
빛 아래서 살았다면 필시 이렇게 하얄 수가 없지. 어둠의 품 안에서 내내 자랐을 것이라. 그림자가 낳은 아이의 두 뺨에서 투명하게 툭, 툭, 자리를 남기며 빠르게 낙하하는 감주에 이츠키가 입을 맞췄다. 고여 있는 둥근 턱 아래서부터 천천히 따라 올라가며 깊게 패인 눈가까지. 카게히라라고 이름 붙여진 인형은 그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익숙하게 그의 품을 둘러 안았다.
이 남자는 가엾어 하지 않고 있다. 슬퍼하는 기색조차 보이질 않아. 오히려 어딘가 즐겁고, 행복해 보인다. 불쌍하다는 거짓말을 하며 종종 눈이나 입가가 웃고 있는 자들이 그의 인생에는 제법 많았다. 그들은 그냥 제 관심을 가지고 싶어 그렇게 에둘러댔다. 미카는 종종 그들의 싸구려 동정에 기꺼이 제 시간을 팔았다. 하지만 기왕에 팔 것이라면 제 값을 받는 편이 좋았고, 돈을 바란다고 솔직히 말하자 그들도 더 흥정하려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 고개를 잠깐 젓고,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고민했다. 거짓, 진실, 그런 것들이.
“……맘에 드나?”
“…그래.”
“도련님이 내를 예쁘게 봐줬으니께, 내도 이 정도는 그냥 줄 수 있데이. 그래도 입에 하는 것부터는 제대로 받을 기다. 도련님은 돈이 억수로 많제?”
“…….”
“…그래, 도련님. 그라믄 도망대신에 내를 살랑가?”
하는 일마다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신은 ‘그 사람’이 원하는 세상의 인재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능력이 되는 이에게 더한 보상이 가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미카는 노력해도 형편이 나아지는 법이 없었다. 어쩌다 함께 하는 일이나 잘 해결되면, 들어오는 돈은 위에서부터 걸러져 결국 한 푼이나 두 푼이나 그 쯤, 사탕 몇 개 집어먹으면 끝날 푼돈만 쥐여졌고. 그게 불만이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구걸이 아니라 제 손으로 벌었다는 사실에 언제나 기뻐했다.
어떤 능력이라도, 가진 것이 무엇이어도 벌이에 써먹는 게 나쁜 건 아니라고 했다. 그것도 노력이라고.
“……더러운 것.”
말뜻을 알아들은 이츠키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뭐가 잘못된 지도 모르고 그저 기분 나쁜 말만 들은 미카의 얼굴도 함께 일그러졌다. 애틋한 것처럼 기대어있던 모양새가 곧 떨어지며 이츠키가 제 외투를 손으로 털어냈다.
“타고난 것이 뛰어나도 천성이 따라가질 못하니……. 네가 죽으면 머리는 내가 가지마.”
“…참말로, 이랬다저랬다. 이상한 말만 허구. 도련님 목이 먼저 떨어질 거란 생각은 안 드나 보제? 내는 당신 목 따윈 안 가질……!”
이츠키가 소리를 지르려는 몸뚱이를 빠르게 잡아채려다 아픈 발목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다. 다행히 제대로 입은 틀어막은 모양이었다. 겨우 저와 그의 몸무게를 지탱한 채 서있던 미카도 곧 넘어가고 말 것이었다. 꿈질꿈질, 기어코 균형을 잡아보려 발을 아무리 움직여 봐도 가능해보이지 않는다. 기우뚱한 것은 한 순간이었다.
비스듬하게 난 비탈 아래로 두 사람이 미끄러진다. 한 사람은 입술을 꽉 물고 있고 한 사람은 입이 막혔으니 상관없지만 바닥에 푹신하게 깔린 낙엽들은 영 소란스럽다. 그 난리에 사람들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야 겨우 멈췄다. 이츠키는 내내 막고 있던 입을 단단히 주의시킨 후에 조심조심 몸을 옮겼다. 마침 아래가 깎인 바위가 있어 그 아래에 몸을 기댈 수 있었다. 미카는 기껏 그가 놓아준 입을 제 손으로 막고서 그 옆에 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순히 산에 오고 싶어 온 자들이 아니다.”
“…내가 나가서 보고 오겠데이. 여 얌전히…… ”
미카가 소곤소곤 말하고는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츠키가 그 손을 붙들었다. 정말 저를 찾으러 온 사람들이라면 이 애가 안전할 수가 없다. 그것을 바라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나 싶었으나 그는 아직 싫증나지 않았다. 이것을 소중히 품에 안아 두고 싶었고, 흠집 하나 나지 않게 잘 보존해 오래간 아름다움을 두고 보고 싶었다. 마음이 다급해지니 후회가 들었다. 괜한 폭력을 쓰려고 드니 이런 꼴이 되는 거라고.
“ --- !”
어지간히 가까이서 부르는 소리에 미카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얼굴 표정이 활짝 펴지는 것을 보니 아는 이인 모양이었다. 이츠키는 마음속이 바짝 졸아 타들어가는 것 같았으나 이 인형은 제 손을 뿌리치고 그 쪽으로 달려갈 준비를 끝마친 것처럼 보였다. 꼭 하는 짓이나 생각이 공이 있다고 마차 다니는 길에 뛰어드는 어린 아이 같다고 여기며, 그는 다시 팔을 훅 잡아 당겼다.
값이야 얼마든, 치루라면 치루지. 갑작스러운 힘에 경계 없이 서있다 제 무릎 위로 쓰러진 아이의 입이 헤 벌어져있다. 이츠키는 그것이 소리를 낼까 두려워 곧장 제 입으로 막아내고는 바짝 드는 어깨를 끌어안았다. 놀란 고양이 같다가, 곧 순한 강아지처럼 가라앉는다. 이츠키는 살살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산짐승이었나?”
오던 이는 곧 가는 이가 됐다. 그러나 이츠키는 입술을 떨어트리지 못하고 이제는 원래 행위의 목적조차 잊은 채 그것에 달려들었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이츠키는 성인이 되도록 인형에나 관심이 있어 서로 입을 맞춘다는 행위를 처음 겪는 중이었던 것이다. 유일하게 인생에서 가졌던 사랑하는 여인은 손끝이나 닿는 것이 과분한 행복이었으므로… 논외였다.
만약 조부가 그에게 성을 가르치려 마음먹었다면 이 아이만큼 적당한 인재를 찾기도 어려웠을 테다. 여자의 몸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혀는 참 탁월했다.
“……하…!”
“…….”
“…… …….”
“……이런 기를 묻는 게, 좋은 게 아인 기는 알겠는데, 그라도 내 함 물어봐도 되나.”
“……알면 그냥 입을 다물어라.”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몇 초 뒤에 잊어버린다.
“처음이가?”
“…….”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의 인형과도 같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금방 살아나 피어나는 봄처럼 활짝 열린다. 이츠키는 그 모습을 힐끔 보다 무릎에서 치워내고 소매로 입술을 닦아냈다.
“참내, 아무것도 안 묻었다! 요란스럽게두 깔끔 떠는구먼? …허긴, 요것두 처음 해본다카니 깨끗하다고 치자, 마.”
“…시끄럽다. 파는 것인 주제에 사족 붙이지 마라.”
“됐데이. 돈 안 받는다.”
뭐라고 쏘아붙일까 하다 다시 표정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이츠키는 벌써 그에게 무엇인가 건네준 것 같은 기분이 들어버렸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의 마음에 쏙 든 것에 틀림없다. 어쩜 저렇게 거짓 없이 속에 든 것을 보여줄 수가 있나. 화가 나면 소리를 지르고, 슬픈 기분이 들면 울고, 즐거워지면 곧 웃어버린다. 그런 아이니 비꼬는 말을 해도 돌아 들을 것이다.
완벽한 인형이 있을까. 질리지 않게 매일이 새로우며, 시간의 수만큼 다양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이츠키는 나이를 먹는 인간에게서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저것들은 분명 살아있어야만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고, 그러니 영영 완벽한 인형을 가질 수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질려서 버려지는 인형과도 같이, 추해져 버려지는 인간과 같이. 그래도 이츠키는 싫증이 나기 전까진 제 몸처럼 그것을 아꼈고, 그렇기 때문에 미카가 살기를 바랐다. 아름다움이 질 때까지는.
“…가라. 어느 정도 걸을만해졌다는 게야. 그래봐야 하룻밤, 한나절 돌본 것뿐이니 이쯤이면 됐다. 곧 쫓아가면 저 치들을 만날 수 있겠지. 잘 알아둬라. 너는 나를 본 적이 없는 거야. 나를 쫓아 산에 왔다가 못 찾고 길을 헤맸을 뿐이다.”
그가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영 걱정되었다.
“……그라믄 내, 가서 사람들 데리고 다른 데로 가자고 할게예. 도련님은 요대로 쭉 가라. 어디든, 내도 모르는 데로…….”
“아니, 안 된다.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마라. 괜히 그런 말을 했다 여기서 내가 잡히면 쓸데없이 추궁을 당할 테니.”
“……이상하제. 당신은 나쁜 사람일텐디, 내는 왜 도련님이 좋은 사람맹키로 느껴지는지 모르겠데이. 그니께… 도련님, 잡히지 마라. 내랑 다시 보지 마.”
진심이다. 하지만 그를 다시 보고 싶어질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그것만은 말로하지 않고 꾹 다문 입술 너머로 삼켜버렸다. 언제인가 몸에 좋다면서 둥글게 만 환을 받아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과 비슷한 맛이 났다. 그때는 사탕이나 물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미카가 가만 서서 그 쓴 것이 준 혼란 속에 빠져 있으려니 이츠키가 그 손을 붙들어 와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뭔가 하고 펴보려는 것을 단단히 주먹 쥐게 하고 저 자신은 다시 뒤로 빠진다. 마르고 다리까지 다친 그의 뒷모습에서 미카는 자신이 저항할 수 없는 무언의 명령을 들었다.
그런 것에는 따르지 않겠다고 했잖아. 어느 새 옆에 와 앉아 있는 차가운 여자아이가 말했다.
“저, 도련…… ”
“찾았다! 공작을 찾았어!”
언제. 이츠키는 낭패라는 표정을 하더니 돌아서 멍청하니 서있는 아이를 툭 밀어 넘어트렸다. 저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하면 같이 있던 걸 들켜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지적할 시간은 없다.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바닥에 주저앉아 저와 뒤에 있는 이들을 번갈아보는 이것이 어떨 때 눈물을 흘릴까. 답은 간단했다.
주먹을 꽉 쥐었다. 어디든 한 대만 눈 꼭 감고 맞추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그런 일을 혐오해온 이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속이 쓰렸다. 데리고 나서지 말 것을, 그 폐허에 그냥 눕혀두고 가버릴 것을. 입 안으로 혀를 차며 인상을 찡그렸다. 마침내 시간에 쫓긴 주먹이 허공을 달려 닿는 것을 허술하게 쳤다. 악, 소리를 내며 미카가 밀려나 바닥에 누웠다.
어딜 맞았는지,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그런 것을 살펴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다. 운이 좋게도 그가 주먹을 날리는 것을 똑똑히 본 것들이 더 빠르게 다가와 미카를 일으켜 세웠다. 한명에게 곧 제 팔도 붙들렸다.
“놔라! 내 발로 갈 테니.”
남은 한 팔도 붙들리기 전에 소리치며 몸을 강하게 틀었다. 한 손에는 제 소중한 여인이 있고, 그녀는 혼자 걸을 수 없으니까. 들어줄 리 없는 말을 뱉어내며 휘청, 흔들렸다. 그들은 이상한 움직임에 다친 다리를 보더니 비웃음과 함께 손에 힘을 풀었다. 절뚝이는 꼴을 하고 저들 손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리라 여겼을 테다.
아, 다친 다리. 이츠키가 이를 악 물고 고개를 휙 돌렸다.
“…이거, 네 옷자락 아니냐.”
“어디 봐. ……미카쨩, 여기 옷은 왜 찢었어? 정말 저 자식 다리에 묶어 준거야? 계속 같이 있었어?”
“말해. 질질 짜지 말고. 멍청한 척 일만 망쳐대더니, 뒤에서 이런 귀족 자식 똥구멍이나 핥아주고 있었던 거냐?”
제 팔을 잡고 있던 이의 목소리가 험악해졌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배신자. 그 말을 들은 자들의 말로가 어떤지 이츠키가 모를 리 없다. 전 공작은 유난히 그런 것에 예민하게 굴었다. 시기가 어수선해지고서는 말이라도 많은 일꾼이라면 눈여겨보다 꼬투리를 잡아 배신자라 낙인을 찍곤 처분했다. 그러니 사태가 이렇게 되기 직전까지 집안은 공기만 시끄럽고 영 조용했다.
배신자. 결국 그 말이 떨어지자 미카를 잡아주고 있던 이가 손을 놓고 바닥에 아이를 널브러지게 두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할까? 이츠키는 친근하게 미카의 이름에 호칭을 붙여가며 부르던 이가 칼을 잡아 빼는 것을 보았다. 낮게만 보던 이들이 나약한 정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때로는 죽음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을 이츠키는 간과했다. 피가 흐르는 코를 대충 닦아낸 미카가 순식간에 일어나 저를 붙들고 있던 자에게 달려들어 바닥으로 넘어트렸다. 그가 생각이라는 걸 할까?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겠지.
“도련, 님! 도망가라! 그리구…… ……!”
정신없는 와중에 시간이 잠깐 멈췄다. 이츠키는 그 조용한 와중에 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니 위험할 게 없다고? 가장 중요한 그 자신이 있지 않나.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날 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들린 것은 무겁고 낮게, 오래간 머릿속을 파고드는 종소리였다. 이 시대가 끝났습니다, 하고 알리는 것처럼.
분노에 찬 남자의 고함소리가 먼데서 들리는 것처럼 먹먹했다. 그렇게 서서히 있던 곳으로 정신이 돌아오며 이츠키는 제가 쉬고 있는 격한 숨을 알아챘다. 이렇게 온 몸으로 숨을 쉬는 것은 어릴 적 누이가 제 인형을 망가트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다시 데려와 온 정성을 다해 고쳐두긴 했어도. 그렇게 마치 당연한 것을 돌려받는 것처럼 투둑, 하고 남자의 몸에 꽂았던 칼을 빼냈다. 따뜻하고 조금은 걸쭉한 것이 얼굴에 튀어 한 쪽 눈을 감았다.
그는 미카를 찌르는 대신 칼을 놓치고 뒤로 몇 번 물러나다, 결국 쓰러져 영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이 새끼가… 해보자는 거냐?”
“…나를 부르는 호칭을 잘 고려해라. 나는 너희 같은 것들이 함부로, …함부로 불러도 되는 사람이 아니란, 거다.”
“……뭐? 이 미친 새끼……. 숨만 붙인 채 데려 오랬으니 팔다리는 부러트려도 되는 거겠지. 아직 천지 구분도 못하는 머저리가 있는 줄 몰랐군, 귀족나리.”
“더군다나 나는, ”
미카는 돌아본 채로 굳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다. 남자가 그런 미카를 옆으로 밀어내고 일어섰다. 그 모습을 돌아본 이츠키는 이미 자신을 잃은 채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으면서도 다시 칼을 고쳐 쥐었다. 남자가 찬 것에 비하면 아주 작았지만 목에 꽂는 것으로 충분하니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내 인형에 손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니까… 주의하는 게, 좋을, 게야.”
잠시 사람이 아닌 것의 눈빛을 했다. 남자는 먼저 달려들지 않고 주춤거리다 그가 가만히 서있는 것을 보곤 먼저 달려들려 다리를 들었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우연일까, 노린 걸까, 정확히 목을 뚫고 들어오는 작은 칼끝은. 남자는 죽었다.
이츠키는 제 칼을 도로 가져가지 않고 뒤에서 남자의 등을 민 자세 그대로 서있는 미카와 눈이 마주쳤다. 이츠키는 아마 주저 앉아버렸을 것이다. 미카가 와서 덜덜 떠는 손으로 팔을 붙들지 않았다면. 그 애는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로 가자, 하며 짧은 말만 남긴 채 걷기 시작했다. 자신도 제정신은 아니었으나 일단 가야한다는 생각을 챙기는 것은 가능했으니까.
*
밤이 내렸다. 이츠키는 아직도 말이 없다. 그 인형인 척 하는 것을 뺀다면. 벌써 며칠 째나 되었는데도 여간 충격이었던 듯 미카가 이끌어야 걷고, 쉬자고 하면 앉고, 밤이 되면 자는지 어쩌는지 마드모아젤만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렸다.
아무것도 안 먹고 있을 수는 없어 미카는 일이 있었던 다음 날에 큰맘 먹고 그와 산을 내려왔다. 없어진 사람들을 찾으러 왔을 테고, 그럼 시체를 봤을 거고, 그럼 산 전체에 사람들이 깔렸을 것이다. 밤에 내려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저는 밤눈이 어둡고, 더군다나 옆에 있는 양반은 숨 쉬는 거랑 걷는 것 외에 뭔가 하려고 들지도 않았으니까. 제 허름한 겉옷을 머리부터 씌우고 저는 천으로 한쪽 눈을 가렸다. 최대한 눈에 띄게 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었다.
“…마, 좀 드이소.”
그가 일이 나기 전 저에게 쥐여 준 것은 작은 보석이었다. 원래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의 모자에 달렸던 것인데, 정신없는 와중에 떨어진 것을 도로 붙여주지 않고 건넨 것이다. 그것의 제대로 된 값어치도 모르고, 괜한 흥정을 해 얼굴을 기억하게 하고 싶지 않아 대충 팔아넘기고 그것으로 먹을 것을 샀다. 물을 담을 통도 샀고.
그런 것들을 챙겨 돌아가는 길엔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어떻게, 언제 말이 퍼졌는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종일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하는 그의 얼굴이 여기저기에 붙어있었으니까. 돌아가면 그가 없어졌을까, 죽어버렸을까, 그런 것들이 두려웠다.
사람들이 아주 많이 죽었다. 좋은 시대가 될 줄 알고 뛰어들 때는 몰랐지. 변화에는 그만한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그나마 운이 좋았다.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그날 마을을 떠난다는 장사치에게 보석을 팔수도 없었을 테고, 조금이라도 빨랐더라면 사람이 죽어 비어버린 집에 그를 둘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 식량을 판 사람도 마을 분위기가 좋지 않다면서 조만간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할 것이라고 지나가듯이 말했다.
“……슈군은 지금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대.”
“도련님, 언제까지 장난이나 칠기가.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란 기다.”
“슈군을 좀 내버려두렴. 섬세한 아이니까 말이야.”
“…됐데이, 그래 버티고 있겠다믄 입을 벌려가 먹일 기다!”
소리를 치며 달려들자 날카롭게 노려보며 목을 움켜잡는다. 그러나 더 어떻게 할 생각은 없는지 곧 풀어주고 다시 돌아 앉아버린다. 그 눈빛에 원망이 서려있는 것도 같고, 후회나 연민이 묻어있는 것도 같다.
“…… ……슈군은, 미카쨩이 보기 싫은가봐. 갈 길을 가는 게 어떻겠니? 아, 그렇지, 가서 미카쨩도 죽을 뻔 했다고 하는 건 어때? 가파른 비탈에서 넘어지거나 하면, 누구라도 믿어줄 거란다! 그리고 슈군이 여기 있다고 전하렴.”
“…….”
“누가 알겠니? 네가 슈군을 도운걸. 두둑하게 보상도 받고, 앞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
조용했다. 나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대꾸하는 소리도 없이. 이츠키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져 어두운 김에 몸을 뉘였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얼마나 버티고, 먹지 않으면 얼마나 버티고, 그런 지식들이 무슨 도움이 될까. 실제로 해보면 되는 일을. 한쪽 팔에 마드모아젤을 뉘이고 그 위를 손으로 덮었다.
그러나 인식하지 못하는 새에 그 손을 치워내고 이어서 제 사랑스러운 여인을 뺏어가는 빌어먹을 손이 신경을 거슬렀다. 이츠키가 벌떡 일어나 도로 가져오려 손을 뻗다 현기증이 일어 그 위로 몸을 넘어트렸다. 아래에 깔린 채로도 손을 번쩍 들어 그가 그녀를 붙들지 못하게 하는 작고 가녀린, 카게히라.
“…이리 내.”
“이제야 말을 하는구먼? 그래 똑바루 쳐다보믄서 으르렁거림 누가 겁이라도 먹을 줄 아나! 내는 안 무섭다! 무서워하는 기는 당신 아이가!”
자신의 아래서 소용없이 버둥거리는 것이 얼마나 하찮았는지, 이츠키는 그만 웃어버릴 뻔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인상은 더 험악해져만 갔다. 무서워하고 있다고? 그 말에 울컥 치솟은 화를 어쩌지 못해 이를 꽉 물었다.
“…나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텐쇼인의 칼이 내 가슴을 찌르고 들어와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을 게야. 가서 전해라. 이츠키 슈는, 제국의 공작은 너희들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내도 내 죽는 건 무섭지 않다! 사람 죽여가 발발 떠는 기를 누가 모를 줄 알고?!”
“……! 말조심해라. 너도 죽여 영원히 이대로 시간이 멈추게 하는 수도 있으니. 내가 두려워한다고? 나는 언짢은 것뿐이란 거다. 이 내 고귀한 손으로, 그런 가축들을 도륙한 것이.”
눈이 녹은 들판에는 어떤 꽃이 피려나? 호기심이 들어 언 땅을 겨울 가는 내내 봐온 소년이 봄에야 돌아와 울어댔다. 왜 그러냐 묻자 그곳은 원래가 풀포기 하나 나지 않는 허허벌판이었다고 하더라. 사람들은 웃었다. 그러나 그것이 본인에게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지 이해하는 이는 그를 다독였다.
얼굴 위에 가득 쌓아둔 가식적인 걱정을 거둬내고 드러난 것이 무엇일까 이츠키는 궁금했다. 원망인가? 분노? 혐오거나. 그것이 무엇이든 그는 그것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겠지.
하지만 난 것 없이 무기력하게 미카는 눈물을 툭툭 흘렸을 따름이었다. 마드모아젤을 바짝 들고 있던 손도 바닥으로 내리고 기운 없이 죽은 몸처럼 누워 이츠키가 아름다워 견디지 못했던 때의 얼굴로 돌아가 울어대더라. 다른 때라면 다시 입을 맞췄을까. 이츠키는 맥없이 끊긴 격렬한 감정의 불길을 어디 덧대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니더.”
“…….”
“그 사람들… 가축 아입니더. 그 사람들 그냥 사람이라예. 가족도 있구, 화도 내구, 웃기도 허구, 당신보다 밥도 잘 묵어예.”
그들이 자신을 죽이려했던 것은 까맣게 잊은 것처럼 순수하게 슬퍼한다. 심지어 북받쳐 오르는지 숨을 덜컥, 덜컥 쉬며 배 아래서부터 우는 소리를 끌어온다.
“당신 나쁜 사람이데이. 가축? 내헌티는 좋은 사람들이었단 말이다. 그 사람들 그냥 살고 싶어가 그런 기라. 이기도 아니믄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자기 새끼 부잣집에 보냈다 시체로 돌려받고……. 당신이 뭘 아나, 당신이…… ”
밀어내려던 손으로 옷을 움켜잡고 더 가까이 끌어온다. 이츠키는 마드모아젤을 빼앗는 것도 잊고 끌려가 더러워진 옷에 미카가 눈물을 닦도록 두었다. 이츠키는 자신이 의미 없다면서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돌아보았다. 안락한 잠자리, 제철의 것들로 풍족한 식사, 언제 버려지고 어제 새로 채워졌는지 모를 옷들, 서양에서 들여왔다는 인형들, 작위, 재산, 땅.
조부는 비공식적으로 작위를 물려주었다. 원래는 행사처럼 진행해야 했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지. 어쨌든 중요한 절차는 무시한 것이 없으니 그날 그렇게 새로운 이츠키 공작이 탄생했다. 어두운 집 안에서, 아주 은밀하게. 원래는 그의 아버지나 형에게 돌아가야 했던 것을 가장 어리고 오래 살 것이란 막연한 이유만으로 그가 떠맡게 된 것이다. 지금은 세력이 기울고 있지만 언젠가는 황군이 이길 것이라고 말하며. 그때가 되면 가문이 꼭 힘을 보태야 한다고 했다. 언젠가가 오긴 오나? 영원한 시간 뒤로 밀리는 게 아닌가? 다들 그런 얼굴을 하고 있기는 했다.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서 그렇지.
몸을 잘 보존해서 가문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야반질주를 시키는 직전까지도 단단히 일러두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평생 지내온 곳을 떠나왔어도 이츠키는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저 가다, 가다, 걸음보다 빠른 소문으로 모두 죽었다는 걸 알았지. 그 말을 자기들끼리 떠들며 의도치 않게 전해준 무리가 저를 응시하는 것을 알고 식당에서 나왔다. 어차피 맛도 없었으니 잘된 일이었다. 얼굴 좀 보자며 그 사람들이 따라 나오기 전까지는.
“…그래. 제대로 대답해주지. 나는 나쁜 사람이다. 이런 유아수준의 말로 나를 표현해야 하다니 참담하구나. 어쨌든 네 멍청한 머리로도 이제 알아뒀겠지. 가라. 마드모아젤은 돌려주고.”
“내는 안 간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게야. 나는 네 동료들을 죽였다. 어쩌면 수십, 수백 명이 끼니 걱정 없이 살았을 지도 모르는 재산도 틀어잡고 있지. 그러니까 그것들도 내가 죽인 거다. 네 여동생도, 어쩌면 나 때문이다.”
“안 간다고 했다, 내는.”
“나의 조부이신 전대 공작께선 하인도 여럿 죽였지. 그들도 네 말대로 가족이 있었을 게야. 사람이었고.”
“내는 안 갈 기다!”
머릿속을 찢고 들어오는 새된 비명과도 같은 외침. 이츠키는 먼 과거에서 돌아와 눈앞에서 갓 태어난 동물새끼처럼 쇳소리로 우는 아이를 가만 보았다. 고통에 겨워하는 것 같다가도 그것을 딛고 서려 무딘 애를 쓰고 있다. 시간과도 같은 수만큼의 아름다움 중에 한 가지. 그는 속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것을 억누르지 못하고 매인 목으로 말을 겨우 끄집어냈다.
“…네 말속을, 나는 모르겠구나.”
“…내는 이제, 산 사람을 위해 살고 싶단 기다…….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서 라던가, 그런 기는 이제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구. 와, 내는 그래 살면 안 되나?”
“…….”
“…죽은 아는 먹이려 해도 못 먹인다. 당신은 아니잖어예……. 당신은 살아있구, 뭐라도 하믄 산다 아입니꺼… …당신이 내를 살려준 기처럼.”
“…….”
“그러니께 당신은 살아야한데이. 죽은 사람들은 아무데도 없다. 아무것도 못혀. 여기는 당신이랑 내, 숨 쉬는 둘이 전부인기라.”
이츠키는 입을 다물고 미카가 울음을 삼키려 노력하는 꼴을 보다 마드모아젤이 아닌 그의 턱을 붙들었다. 가느다랗고 섬세한 손이 달아오른 뺨을 살포시 눌러 안을 보이라고 재촉한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들썩거리던 미카가 그 손길에 얌전히 입을 벌렸다. 곧 마드모아젤을 그 자리에 두고 목부터 끌어안았고.
어떻게 이렇게 빈약한 머리를 가진 것이 사랑을 돌려 말했을까. 아마 그게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츠키가 알아듣는 것에 문제는 없었다. 그는 속에 있는 것을 보이는 모든 것으로 드러내는 이니까.
“내를 당신이 뭐라고 불렀는지, 다시 말해도.”
“……카게히라.”
“…마음에 든다. 내도 성이 생겼구먼. 이츠키 씨, 세상이 변하기는 한 거 같데이, 그제? 천한 것도 성이 생기구….”
속이 즐거워진 모양인지 눈가에 여전히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곧장 웃음을 터트린다. 이츠키는 첫입맞춤의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당신도 그만 두이소, 도련님 같은 기는. 공작(こうしゃく)은 등딱지(こう) 길이(しゃく)에나 써버리는 기다.”
그런 아무도 안 웃을 말장난을 하고서 혼자만 즐거운 듯 웃어버리는 입이 울고 있지 않아도. 이츠키는 입을 맞췄다. 그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아직도 어여삐 여기기만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어쨌든 그들을 살아있었다. 살아, 숨을 나누고자 했다.
*
앉아있자니 해가 떴다. 이츠키는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카게히라의 탓에 삐뚤게 앉아 아침이 오는 것을 보다가 옆에 잘 앉혀둔 마드모아젤의 머리에서 손수건을 회수해 주머니에 넣었다. 편하게 누워 자라니까 말을 듣지 않고 옆에 꼭 앉아 있던 아이는 여태 자고 있다. 자신은 여러 생각들을 하느라 꼬박 밤을 샜건만.
만약에 관한 생각들을 주로 했다. 그 인력거를 타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 길목에서 붙잡혔더라면, 그런 것들. 키류 부인이 죽지 않았거나 형, 아버지가 작위를 물려받았더라면, 산에서 그 아이를 마주치지 않고 넘어갔었다면, 빚을 갚겠다고 할 때 코웃음 치며 쫓아내버렸다면…… 시대가 변하려 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으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
그것이 의미 없는 생각들임을 깨달았을 땐 이미 짧은 새벽이 스치듯 지나가고 있었다. 이츠키는 당장 오늘과 내일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임을 인지했다. 평생 살면서 그런 걸 염려해본 적이 없어 생소하고 어색했으나 카게히라는 다를 테니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결론을 지어버렸다.
깨진 창문너머로 흐릿하게 지평선 너머 태양이 고개를 내밀었다. 세상은 이제 어느 정도 밝아졌고, 이츠키는 제 옆으로 시선을 옮겨보았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세상 어느 것보다 아름다운 그의 카게히라가 거기 눈을 감고 인형처럼 앉아 있다. 이제는 꿈을 꾸어도 내내 아름다워라, 그의 머리를 감싸 안은 채 그렇게 말해주었다.
“…이츠키 씨.”
“일어나있었나.”
태양이 뜨는 것처럼 천천히 열리는 찬란한 노란색 눈이나, 제 색을 찾아가는 하늘처럼 파란 눈. 그는 마음이 동해져 카게히라의 머리칼을 위로 쓸어 올렸다. 금세 동그랗게 뜨여 저를 보는 눈이 고스란히 자신을 담고 있다.
“…묻고 싶은 게 있어가 고민하고 있었데이.”
“뭐냐. 이른 아침부터.”
“와 텐쇼인 씨는 이츠키 씨를 찾는 기가…? 텐쇼인 씨를 죽일라고 했나? 그라믄 내랑 가서 사과할까?”
“……오늘 내일만 고민하면서 사는 녀석이라 생각도 지나치게 짧구나.”
한심한 듯 보아도 여전히 소중하게 안고 있다. 카게히라는 그 손길에 안심이 되어 입을 툭 내민 채로도 무게를 실어 기대 눈을 내리 감았다. 감은 눈 안에서 눈이 몇 번 굴러가고 속눈썹이 그에 따라 흔들린다.
“……우리 가문은 너 같은 녀석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재산이 어마어마하다는 게야.”
“그런 기는 내도 안다. 와 뜬금없이 자랑이고?”
“조용히 좀 해라. 너는 입만 열면 머리를 아프게 하니, 칫.
……교역지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처럼, 돈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모이는 법이란 게야. 천하를 바꾸려 드는 자들이니 돈이며, 사람이며, 어마어마하게 들겠지. 작위 없는 부호들이야 황실에서 돌아서면 그만이지만 귀족은 그럴 수 없으니까 구실을 만들어 죽이는 거다. 가문이 사라지면 소유하고 있던 재산은 주인이 없어지니 그걸 꿰차려는 수작이지.”
문득 공작 가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곧 코로 웃고 의미 없이 날려 보냈지만.
“어차피 이츠키 씨는 여기 있구… 훔쳐 가면 되는 거 아이가?”
“속물들이라도 세상의 법칙 안에선 도망갈 수 없는 것일 테지……. ……그것들이 돈을 눈앞에 두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생각을 하니 속이 조금 낫다는 게야!”
카게히라가 팔자로 눈썹을 내리고 기분 좋은 듯 웃는 그를 보았다. 성격 참 나쁘다. 하지만 내내 우울하게 쳐져있던 것을 보고 있다 저런 모습을 보니 저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 와, 하고 함께 소리쳤다. 사실 어려워 한 말도 다 이해가 안 갔지만 어쨌든 텐쇼인이란 사람은 그를 쫓을 테고, 찾으면 가지고 있는 돈을 뺏기 위해 죽일 거라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세상 끝까지 도망가자. 어디라도 상관없다. 다시 구걸을 해야 한 대도. 그는 제 옆에서 살아줄 테니까. 카게히라는 그 확신을 갖기 위해 이츠키에게 기대 잠들기 전까지 한평생을 슬퍼했던 죽음에 대해 돌아보았었다.
영영 함께할 수 없게 되는 시간 속에서 함께였던 순간을 곱씹어야 했던. 거기서 더 나아가면 함께할 수 있었던 순간들을 망상하고, 결국 없는 것을 맘속에 불러들이고 만다. 죽음의 때는 순식간에 사라지겠지만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그런 어두운 감정의 그림자들 때문에 내내 울어왔던 것이다.
사실 아직도 슬프다. 마음속에서 그것들이 사라질 날은 영영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때에 카게히라, 그렇게 이름을 불리는 생각을 하고나면 옆에 난 그의 자리가 그것들보다 더 커졌다. 그게 참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바람에 카게히라는 그가 죽지 않기를 더 간절히 바라게 됐다. 그 자리에 남을 어둠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게 될 것만 같았기에.
“공작님?”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다. 일그러지는 이츠키의 얼굴이 아니었다면 그가 적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이츠키는 제 겉옷을 카게히라의 위에 덮어주고 구석에 숨을 것을 눈빛으로 전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가엾은 아이는 다시 혼자 남게 될 거란 두려움에 왈칵 눈물부터 났다. 일어나는 이츠키의 손을 붙들고 고개를 저었다.
“가지마이소. 죽인다카지 않았나.”
“…나가지 않는다고 될 일이 아니야.”
“이츠키 공작님, 안에 계신 걸까…….”
장난스럽게 문을 두드려온다. 이츠키가 닿으면 베일 것 같은 눈을 하고 문을 노려보다 카게히라가 고집을 부리며 놓지 않는 손에 힘을 더 주어 당겼다. 카게히라는 그가 그럴수록 더 처절하게 하얀 손목을 붙들었다.
“내가 나가지 않으면 너도 죽는다는 게야.”
“…그냥, 그냥 다 줘버리란 기다. 내가 어제 도련님이나 공작 같은 기는 하지 말라고 그랬제. 이제 그런 기는 안 한다고 해라. 쥐구멍에 숨겨둔 쌀 한 톨까지 다 준다고 해버리란 말이다!”
“큰 소리 내지마라…!”
“문을 부수고 들어갈까요? 공작님.”
“금방! 금방 나가겠다. 네가 직접 온 이상 혼자도 아닐 테고, 도망칠 수 없을 테지. 잠시 나갈 준비를 하게 해라.”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사랑하는 여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행복한 듯 내는 웃음이. 그 웃음마저 죽일 듯이 노려본 뒤 이츠키는 카게히라의 앞에 앉았다. 한숨을 푹 쉬고 난 그는 잔잔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에 비해 카게히라는 살짝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이를 악 물었다. 그 입술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상처가 생긴다.”
“…그기, …그기 지금 뭐가… 중요한데…….”
“너는 아름답다. 나에겐 그것이 중요하단 게야.
“내는, 이츠키 씨… 당신이 사는 기 중요하다….”
다시 앙 다물려 하기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대었다 떨어졌다. 살아있는 것을 이토록 예뻐한 적이 없었는데. 만약이라는 것들이 이뤄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것을 만나 이런 아름다움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테니.
“…아직 모르겠지만, 물론 앞으로 알 날이 오지도 않을 것 같다만… 때로는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도 있는 법이다. 나는 공작이기 전에 이츠키 슈가 아니라, 이츠키 슈이기 전에 공작이란 게야. 나는 죽는 날까지 황실에 충성해야 하고, 그것이 나와 내 가문의 품위와 명예를 지키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저 속물이 내게 예의를 지키는 것도 같은 이유지.”
둘은 너무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다. 어느 한쪽이 어느 한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이츠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카게히라는 지나치게 무지했다. 결국 핑 도는 눈물을 견디지 못해 떨어트리고 온 몸을 떨며 카게히라가 말을 뱉었다. 나름 자기 딴에는 자세하게, 그를 닮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품위? 예의? 그런 기 밥을 주드나? 이츠키 씨, 당신이 말했제, 저 사람은 당신 돈이 가지고 싶은 기라고! 결국 당신 목숨을 쥐고 있는 기도 돈이란 말이다! 그라믄, 그라믄 당신도 돈 아래 있는 기다. 당신은 속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응?!”
“카게히라.”
바들바들 떠는 가녀린 손에서 제 손을 빼내고 평소처럼 마드모아젤을 안아든 채 일어선 남자. 그 남자는 더러운 행색을 하고서도 공작의 모습을 드러내고 고귀한 눈을 깔아 카게히라를 내려다보았다. 그토록 진중하고, 신중하게 불리는 이름의 가치. 난생 처음으로 받아보는 존중은 지독하게 무거워 카게히라가 감히 몸을 일으킬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것도 언젠간 받쳐 들고 일어날 수 있게 되겠지. 평생을 수많은 사람들의 위에 있던 남자가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자에게 인생 최초로 그런 기대를 했다. 태생, 천성, 이런 것들은 제 대에서 맥이 끊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 그의 가장 사랑하는 인형이 한 말처럼, 모두가 사람일뿐이니까.
이런 것에게 무언가를 배울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츠키는 그에게 말해야 했다. 얼마나 자신이 그를 아끼고 있는지.
“너는 명예 같은 것이 허물이라 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자들에겐 그것이 실상인 게야.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아름다움이고. 그러니 내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지.”
이츠키가 손을 내려 마드모아젤을 카게히라에게 건넸다. 그리고 아직 지끈거릴 다리로 멀쩡한 양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다쳤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를 지탱하고 있는 그런 자존심. 그것이 카게히라가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그의 모습이었다.
이 때엔 시대가 참 많이, 빨리도 변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보다도 더 무수한 스침으로 변해갔다. 그러니 참으로 격변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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終結部
[혼란기(混亂期); 뒤죽박죽이 되어
어지럽고 질서가 없는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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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個月後
카게히라는 멀끔한 옷을 입은 채 영문도 모르고 사람이 와글대는 항구에 서있다. 저곳 어딘가에서 연설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 얘기를 해대고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있었지만 카게히라는 그저 배가 뜨기 최적인 하늘을 응시하기만 했다. 어떻게 살기는, 때 되면 밥을 먹고, 잠에 들고, 그러면 되지. 한숨처럼 투덜거리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습관처럼 빈손의 무게에 놀라 마드모아젤의 부재를 다시금 깨닫는다.
그날, 이츠키가 잡혀가고 조용해지길 기다렸다 그들을 쫓아 텐쇼인이란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더랬다. 그러나 남아있던 몇 명이 집안으로 들어와 저마저 붙들어버렸다. 그들은 카게히라를 데려가며 마드모아젤을 뺏으려 했지만 그건 이츠키가 지키고자 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안간힘으로 버텼다. 그토록 텐쇼인, 텐쇼인, 이츠키가 노래로 만들어 부르던 이가 와 그만하게 만들 때까지는.
그 뒤로 삼 개월이다. 곧바로 죽거나 감옥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카게히라는 평범한 방에 들여보내졌다. 물론 갇혀있는 거야 감옥과 비슷했지만 그렇게 넓은 방에선 지낸 적이 없는지라 이상한 기분만 들었다. 갑갑한 것은 바깥의 소식이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엔 그가 죽었을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돼 식사도 거부했다. 그러나 여동생의 때처럼 악몽을 내내 꾸는 것만은 버틸 수 없었던 바람에 차라리 그도 잊자, 인정하고 마음 한쪽에 슬픔으로 남겨두자 싶어 식사를 가져다주는 이에게 사정사정하며 물었다. 이츠키가 죽었느냐고. 그러나 그는 울며 애원하고, 화를 내며 협박을 해도 밥만 내려둔 채 나가버렸다.
카게히라는 그냥 모두 포기해버렸다. 답답하게 만들어 죽일 건가보다, 싶어 언제부턴가 밥도 전부 비우고 밤에 악몽을 꾸면 못 잔만큼 낮에도 잠을 청했다. 보란 듯이 늙어 죽을 때까지 살아주는 게 제 딴에는 복수였다.
“…날이야, 참말 좋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텐쇼인이란 사람이 들어오더라. 잔뜩 경계하며 노려보고 있는 저를 두고선 천사처럼 웃으며 마련된 의자에 앉아 제 손으로 차를 우렸다. 나란히 앉아 마시지 않을 거라고 쏘아붙여도 꼭 제 몫의 잔에 차를 따라둔 그는 이츠키에 대해 이야기했다. 예전에 꼭 들어본 적 있었던 이야기들도 있었다.
빈부격차가 심해져 계급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생계마저 이어가기 힘들 때에도, 그들은 배불리 먹으며 어떤 때는 남은 음식들을 개밥으로 주거나 그저 쓰레기통에 버리며 살았다고 했다. 풍류니 하는 것들을 위해 서민들에게 재미로 잔인한 짓을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고, 그 모든 행동들은 그들이 귀족이나 부자가 아닌 사람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아서라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기울어가며 고통 받는 이들이 늘어난 까닭에 세상을 변화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얘기를 했다. 그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죽지 않아도 될 목숨들에 대해서도 말을 늘어놓았다. 이것이 예전에 이츠키에게서 들었던 부분이다.
그는 그러면서 너도 한때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았냐고 물어왔다. 이제와 귀족의 편을 드는 이유도. 카게히라는 절대, 아무 말도 해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주제에 입을 열었다. 말을 해도 상황이 변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을 따지는 것보다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그에겐 더 알맞았다.
그 사람은 귀족 아입니더. 공작도 아니구, 도련님도 아니라예. 내가 그래 되라고 했십니더. 사람은 죽였을지 몰라도 그건 그 사람도 살려고 그런 깁니더. 하모… 그 사람은 사람 죽여 가며 살 수 있는 양반도 아니지만은……. 하여튼. 내는 귀족 편을 드는 기도 아니지만, 당신들 편도 이젠 안 들라고. 무식해서 왕이니, 세상이니, 그런 기는 모르니까예. 내는 그냥 카게히라 미카고, 그 사람은 그냥 이츠키 슈데이. ……내는, 내는 그 사람이 좋고…, 당신이 싫다.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죽였으니께.
그는 그저 웃었다. 특히 마지막 말에는 소리까지 내어 한참 웃더니 입가를 가리고 소리를 죽였다. 달려들어 멱살이라도 잡을까했지만 그가 나가려 몸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냥 두었다. 그러나 그는 나가지 않고 저에게 다가와 마드모아젤을 달라고 하더라. 카게히라는 결국 그의 멱살을 잡고 눈물을 글썽였다. 이건, 그가 지켜달라고 한 거다.
그가 어쩔까, 사람을 불러서 자기도 죽게 만들까, 그런 걸 고민하면서도 잡은 주먹에는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마치 죄 없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더 좋은 것을 주겠다고 말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신뢰가 갔다. 이성적으론 몰라도 본능적으론, 그냥 줘도 될 것 같았다. 한편으론 저보단 그가 가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자신은 관리도 못해 예뻤던 머리카락도 다 헝클어지지 않았나. 낮이고 밤이고 껴안고 지냈으니 당연하지만. 게다가 아무리 그라도 인형을 죽일 수는 없다.
지킨다는 건 뭘까. 그저 욕심 부려 곁에 두는 것인가? 카게히라는 이츠키가 저를 혼자 두고 나가버린 이유도 많은 것을 지키기 위함이었음을 알기에 저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물론 텐쇼인이 마드모아젤을 데리고 나간 직후엔 후회도 들었지만 이츠키도 이만큼은 가기 싫었을 거라 생각하니 좀 나아졌다.
그러나저러나.
“…주기는 뭘 준다고. 돈 몇 푼 받은 게 다구먼. ……내 죽으믄 이츠키 씨헌티 억수로 혼나겠제.”
내보내지기 전날 밤, 텐쇼인이 한 번 더 그의 방에 찾아왔다. 그는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야 전이랑 다를 게 무어냐고 쏘아붙였으나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며 차차 진행해 나갈 것이라고 계획을 전해왔다. 혼란을 최대한 적게 겪으며 사람들부터 일으켜 세우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는 일이라고. 그런 것을 왜 말해주나 싶어 대꾸를 안 하자 잠시 후에 작별을 고하고 조용히 나갔다. 그가 있다 간 자리에 커다란 짐 가방과 배표가 남아있었다.
그래서 카게히라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일단 할 것도 없고, 갈 곳도 없고. 그저 멀리 가보면 뭐라도 있을까 싶어서.
그런 그의 앞에 그림자가 짙게 진다. 느지막하게 눈치 챈 탓에 그만 부딪혀버려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웬 남자가 태양을 등지고 서있다. 눈부신 태양, 자신, 그 사이에 그가.
“이름이 뭐냐, 계집.”
“뭐꼬? 내는 계집아 아입니더! …응앗?!”
바닥에 주저앉아 거짓말처럼 제 위에 자리 잡고 있는 눈을 올려다보았다. 어쩜 저렇게 얄밉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있는지. 카게히라는 소리라도 지를까 하다 눈앞에 있는 그의 바지를 부여잡고 펑펑 울었다. 마음속에 가둬두고 있던 슬픔들이 녹아내려 가슴을 아프게 하고, 그 뒤엔 눈물에 씻겨 내려가 마른 바닥을 타고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이러다 배를 놓쳐버린다. 정말이지, 마드모아젤도 간수 못한 주제에 뭘 잘했다고 이렇게 우는 게냐. 일어나라, 옷이 더러워진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할 소리가! 밉다! 내는 이츠키 씨가 제일로 밉단 말이다!”
“…그럼 나만 배를 타러 가도록 하겠다. 너는 여기 남아라.”
“그기 더 싫다! 응아아! 이츠키 씨는 바보다!”
울며 소리를 왁왁 질러대는 것을 가만 둘 수가 없어 이츠키가 허리를 굽혔다. 각이 잘 나있는 톱 모자를 살짝 들어올리고, 저를 보는 얼굴 앞에서 멈췄다. 입을 맞출까 하다 옆으로 빠져 머리카락 아래 숨은 귓가에 무언가 작게 속삭이곤 빠르게 일어나 걸어간다. 카게히라는 숨까지 멈추고 가만있다 후다닥 일어나 그 뒤를 따라 나섰다.
“이츠키 씨, 사랑이 뭐고?”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남자와, 끈질기게 물어대는 소년. 그들의 뒤로 새로운 나라가 열렸다. 새 왕, 새 이름을 가지고서. 이제 시대는 혼란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들이 뒤집어져 바뀐 것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것을 낡은 것 위에 덮어가며. 하지만 그 일들은 모두 사람의 것이라,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을지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모든 사정은 그들과 상관없는 이야기다. 아주 멀리 떠나는 배 한 척이 고동소리를 내며 출항을 알려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