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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RaeAh

 

  이름은, 카게히라 미카. 너보다 한 살이 어리단다. 괜찮다면 같이 놀아줄 수 있겠니?

 

 

  제일 처음 미카를 소개받던 날이 떠올랐다. 제 아버지의 등 뒤에 숨어, 어설프게 그의 소매를 끌어당기며 무언가를 숨기려 무던히도 애쓰던 모습이. 고작 열한 살 난 아이가 숨기려던 것은 단 하나였다. 서로 색이 다른 두 눈동자. 남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허공을 맴돌던 그 눈빛과 끝내 마주친 순간, 슈는 무의식중에 생각했다. …예쁘다.

 

  속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슈의 눈에 비친 미카의 눈동자는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웠다. 줄곧 옆에 끼고 살던 그 어떤 인형의 보석 안구보다도 눈이 부셨으며, 어머니의 화장대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던 반지 알보다도 영롱했다. 노란색과 푸른색의 수정은 눈이 마주친 상대가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걸 눈치 챈 순간 곧바로 사르르 풀어졌다. 그러더니 불쑥 그때껏 잡고 있던 아버지의 손을 놓고 앞으로 한 발짝 걸어 나와, 슈에게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슈 형, 맞제?"

 "…응."

 "만나서 반갑데이. 내는 카게히라 미카라 칸다."

 "……반갑다."

 

  얼떨결에 작은 손을 잡았다. 약간 남아있던 불안감마저 완전히 잊은 얼굴로 미카는 웃었다. 그 웃음에 슈는 맞잡은 손을 통해 전기라도 흐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누군가 나를 향해 저토록 환하게 웃어준 게 언제였지. 문득 기억 속에서 어머니의 잔상을 끌어올렸다. 마지막까지 눈물밖에 없었던 여리고 가엾은 사람을. 미카의 웃음은 그녀의 그것처럼 저를 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슈 자신도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마음을 열고, 그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않았던 자신의 방에 아이를 들여보내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미카와 함께 있는 시간은 마냥 행복했으니까.

 

 

  아이에게 있어 거대한 저택은 맞지 않는 옷처럼 너무도 크고 버거울 따름이다. 더군다나 그 큰 집을 하루 종일 지켜야 하는 게 그 자신뿐이라면 더더욱. 슈는 어릴 때부터 집이라는 공간이 싫었다. 남자아이의 방이라면 으레 들어차있을 법한 칼과 장난감 자동차가 아닌 소녀 인형들로 가득 찬 자신의 방도, 온종일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껏 단 과자를 찾아 먹을 수 있는 식당도, 마법에 걸려 깊은 잠에 빠져버린 어여쁜 공주를 구하러 온 용맹한 왕자의 이야기를 담은 동화책도, 그 무엇도 슈에게 만족감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바깥의 아이들은 제가 사랑하는 것들을 괄시했고, 제가 질색하는 것들은 바깥의 아이들에게 최고의 놀잇감이었다. 자연히 안으로만 돌게 되었다. 어머니의 병상 곁에서 그녀가 만들어준 인형으로 인형극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만이 슈의 인생에 있어 전부였다.

 

 [슈, 오늘은 날씨가 좋구나. 밖에 나가서 놀다 오지 그러니?]

 […저는 집 안에 있는 게 좋아요.]

 [햇빛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란다. 하지만 슈는 다음번에 해도 괜찮을 거야. 아직 기회가 많이 남아 있잖니?]

 [다음번에는,]

 [응?]

 [다음번에는, 아버지와도 같이 산책할 수 있는 건가요?]

 

  연보랏빛의, 외아들에게 물려준 빼어나게 아름다운 눈동자에 투명한 기색이 어렸다. 슈는 급하게 말을 거두었다. 아버지라는 단어는 금기어였다. 꽃처럼 고귀하고도 햇살처럼 포근하게 피어있던 어머니를, 가장 빠르게 어둠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 눈을 깜박이기만 해도 사라져버릴 듯 아스라이 맺혀있는 물방울을 보고 싶지 않아서, 슈는 재빨리 금발머리 인형을 집어 들었다. 푸른색의 옷자락이 손끝에서 기분 좋은 촉감을 내며 스쳐지나갔다.

 

 " - 다 됐다."

 

  상념을 깬 것은 미카의 경쾌한 음성이었다. 두꺼운 책에 눈길을 꽂고 있던 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린 날, 인형의 뒤에 숨어 최대한 밝은 척 자아내던 목소리에 초여름의 사근사근한 햇살처럼 웃어보이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서 차츰 흩어졌다. 미카는 막 완성했는지 적자색의 천으로 된 자그만 드레스를 들어보였다. 금빛 단추까지 도르르 달려있는 섬세함에 슈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내도 인자 꽤 한다 아이가 - . 미카가 자랑스레 말을 이었다.

 

 "…예쁘군. 꽤가 아니라, 훌륭한 솜씨라는 것이다."

 "응앗? 내 지금 스승님헌티 칭찬받은 기가?"

 "…그렇다고 해두기로 하지."

 "기쁘데이~ 그라모, 마드 누나한티 입혀줘도 되긋나?"

 

  마드 누나? 뜻을 알아듣지 못한 슈의 짧은 정적에 미카가 손을 뻗어 피아노 위를 가리켰다. 예나 지금이나 줄곧 똑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초록색의 눈동자를 가진 인형. 미카가 불현듯 인형 옷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부터 품어왔던 의구심이 그제야 눈 녹듯 풀렸다. 마드모아젤에게 옷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거구나. 어머니가 살아있던 시절부터, 안방이 빈 채로 몇 년째 줄곧 방치되어 있는 지금까지, 줄곧 같은 옷만 입고 있던 그녀 - 마드모아젤 - 가 마음에 걸리기라도 했던 걸까. 슈는 망설이지 않고 허락을 내렸다. 여전히 온화한 미소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인형을 미카에게 건네주자 환히 웃으며 그것을 소중히 받아 안았다.

 

 "내사, 계속 신경이 쓰여가… 아직 바느질은 스승님보다 몬하지만서도, 한 번쯤은 꼭 마드 누나 옷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왜 하필 마드모아젤의 옷이었지?"

 "그기야… 스승님이 제일 좋아하는 기 마드 누나인 것 같았으니께. 근디 내는 스승님이 제일 좋아가, 스승님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기 없을까 한참 고민했다 아이가. 그러다 보니께 마드 누나가 눈에 들어온 것뿐이데이."

 "…뭐, 어쨌든 고맙다는 것이다. 나조차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신경 써 주었으니."

 "근디, 스승님은 진짜 말 안 해줄 기가?"

 

  빠르게 손을 놀리며 그새 마드모아젤에게 새 옷을 입혀준 미카가 인형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엇을? 조금 날이 선 듯한 슈의 말투를 느꼈는지 눈이 마주치자 미카는 어깨를 조금 움츠리며 살짝 머쓱한 듯 웃었다.

 

 "마드 누나가, 스승님한티 어떤 존재일까. 항상 궁금했데이."

 "…."

 "근디, 됐다. 말해주기 힘든 거믄, 무리할 거 없다."

 

  도리어 저를 달래려는 듯한 그 웃음에, 슈는 끝내 그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해버렸다. 마드 누나는 데려가레이. 미카가 건네주는 인형을 받은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초록색 눈동자는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은 행복하니, 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요. 아주 조금은,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높아진 눈높이만큼, 그리고 함께 커버린 키만큼이나, 크나큰 저택은 더 이상 슈에게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아니었다.

 

 

 *

 

 

  모처럼 날씨가 좋았다. 슈는 어느새 반 이상이 녹은 창틀의 눈을 바라보며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입김은 나오지 않았다. …봄이구나. 들뜬 목소리로 저를 부르며 등 뒤에서 달려와야 마땅할 미카도 오늘만은 보이지 않았다. 친척들이 온다고 했었지, 아마. 늦은 시각, 저를 데리러 온 아버지와 손을 맞잡고 귀가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부자(父子)의 뒷모습에 이유도 모른 채 눈가가 뻐근해져 왔었다.

 

  스승님 집에는 와 가족사진이 한 개도 없나? 언젠가 미카가 물은 적이 있었다. …가족이라는 게, 있은 적이 있었나. 슈는 크로아상을 집어든 채로 한참이나 생각했다. 시계 초침만이 들려오는 적막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겨우 답을 할 수 있었다. 가족이라는 게, 없는 사람도 있다는 거다. 제가 생각해도 참으로 우스운 답이었다. 그 괴상한 답변에 대해 미카는 다행히도 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집안의 창문이 검은 커튼으로 가려지고 슈마저 검은 상복을 입었을 때에도, 조문을 온 미카는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스승님, 그래 안 봤는데. 인자 보니 거짓말쟁이네.]

 [….]

 [가족 같은 거, 없다캐놓고…]

 […인정하기 싫다는 거다. 애초부터 용서할 마음은 없었지만… 그 치에게는, 멋대로 이 집에서 세상을 떠날 자격조차 없으니까 말이지. 어머니를, 나를 그렇게 무책임하게 내버려두고… 멋대로 나를 고아로 만들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내는 잘 모르지만… 스승님 말만 들어서는 윽수 나쁜 사람 같데이. 근디 스승님은 와 울고 있나.]

 

  제 머리칼보다 조금 짙은 색의 정장을 입은 미카가 곁에 다가와 조심히 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래 하는 기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울 때는 가족들이 이래 해줬다 안카나. 천천히 머리 위를 가로지르는 손길에 슈는 그만 미카의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순수하고도 영특한 생각에, 궁금한 것만큼이나 알려주지 않는 것이 많은 제가 한 번쯤 미웠을 것임에도 무엇 하나 끝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묻지 않는 고요함에, 그리고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묘한 안도감에, 울컥 터져버린 감정은 밤이 깊도록 좀처럼 봉합되지 않았다. 미카는 새벽이슬이 내릴 때까지 어린 상주(喪主)의 곁을 지켰다. 잠깐 눈을 붙였다 일어난 슈의 곁에는 은방울꽃 한 다발이 놓여있었다.

 

  오다가, 스승님 생각이 나가, 좀 꺾어와봤데이. 미카가 내미는 꽃을 무심코 받아들었다. 마침 꽃병의 장미가 다 시들어서 걱정하던 참이었다.

 

  하얀 꽃망울이 흐드러지게 달린 모양새가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그날과 같은 꽃. 다만 지금의 이 꽃다발에서는 그때와는 다른, 햇살을 닮은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제법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방까지 따라 들어온 미카가 눈을 빛내며 어제 있었던 일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사촌누나가 왔다 아이가, 로 시작해서, 그칠 줄을 모르는 긴 이야기였다. 그래서 스승님, 꽃은 마음에 드나? 어느새 저에게로 포커스를 돌린 미카에게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환히 웃는다.

 

 "다행이다. 내 보기에는 그기 제일 예쁜 것 같아가 골랐는데."

 "뭐, 덕분에 방이 제법 화사해졌다는 것이다. 한데 카게히라, 너는."

 "…?"

 "왜 이런 날 밖에 나가서 놀지 않지?"

 

  정곡이라도 찔린 듯 미카의 표정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내는 이 눈 때문에, 밖에는 몬 다닌다. 마드모아젤의 손을 한 차례 꼭 잡았다가 놓은 미카가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저 예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었기에.

 

 "그래도 괘안타 안카나. 스승님이 있지 않나. 스승님은 내 눈에 신경을 안 써서 좋데이. 남들 앞에서는, 혹시 누가 내를 쳐다보진 않나 계속 신경이 쓰여가… 불편하다."

 "…정말 모르는 건가, 모르는 척 하는 건가. 그런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도."

 "응? 내 못 들었다."

 "……아니다, 됐다."

 "…."

 "오늘은 자수라도 놓도록 하지."

 

  스승님이 가르쳐주는 기가? 확 밝아진 미카의 표정을 보며 슈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명색이 교외 지역에서는 가장 명성이 높다는 재단사의 후계자가, 언젠가 가업을 이어받게 될 위치에 있으면서도 세세한 것 하나까지 제대로 배워본 적 한 번 없는 저의 손을 타지 않으면 안 된다니. 몇 번 바느질을 가르쳐준 게 다였는데도 그걸 용케 기억한 미카는 몇 년째 슈를 스승님이라 부르며 따르고 있었다. 덕택에 처음에는 실뜨기 정도가 전부였던 실력이 그런 대로 늘어, 이제는 마드모아젤의 옷을 넘어 사람이 입을 옷까지 손볼 수 있는 정도가 되었지만.

 

  미카의 부친은 사람의 마음에까지 꼭 들어맞는 옷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슈의 집안이 오랜 세월 같은 자리를 지켜왔듯 선대까지 합치면 근 오십 년 가량을 굳건히 한 자리에서 옷감을 재단하고 시침질을 하며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왔다. 슈의 집에서 경조사가 있을 때에도 적시적소에 맞는 의상을 만드는 것은 늘 그의 몫이었다. 어린 자신에게 연미복을 건네주며 지어보이던 미소가 여전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수 본을 따라 부지런히 바늘 든 손을 놀리는 미카를 바라보다가, 문득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열중하는 뒤통수를 어색한 손짓으로 두어 번 쓸어내렸다.

 

 "응앗, 뭐, 뭐꼬."

 "…아니다. 제법 열심이구나."

 "그, 그야… 스승님이 내보다 훨씬 잘하니께, 스승님을 따라잡으려면 지금보다 더 애쓰는 것밖에는 수가 읎다 안카나."

 "이쪽도, 마냥 기다리지만은 않겠다는 것이다."

 

  야심차게 슈를 돌아보는 두 눈동자가 저마다의 색채로 빛나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와, 영원을 가둬둔 호박(琥珀). 저 아이는 어떤 솜씨로 어떤 이야기를 창조해낼까.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슈는 가슴이 뛰었다. 뭐, 차차 저 아이의 곁에서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잠시 멈췄던 바느질을 다시 시작했다. 채칵채칵, 한때 그리도 저를 쓸쓸하게 만들었던 시계 초침 소리가 이제는 따스하게 방 안을 감싸 안았다. 마드모아젤의 녹색 보석안구가 이른 오후의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새로 물을 갈아준 꽃병에는 은방울꽃 한 다발이 소담하게 꽂혀있었다.

 

  행복하니, 슈? 어김없이 들려오는 지난날의 목소리에 슈는 대답 대신 미카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한때는 대답할 수 없을 만큼 씁쓸했고, 또 한때는 선뜻 답을 내리기 두려울 만큼 달콤한 물음이었다. 손을 뻗으면 아스라이 사라져 버릴까봐. 인형의 머리칼 끝에도 닿지 못하고 거두어져버린 어머니의 손끝처럼, 그렇게 한순간 빛이 바래 버릴까봐. 하지만 손을 뻗으면 이 아이는 늘 그 자리에 있었고 간혹 저도 모르는 새 눈물을 흘리고 있노라면 망설임 없이 어깨를 내어줄 줄도 알았다. 그리고 더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어둠을 몰아내고 푸른 새벽과 샛노란 햇살을 선물해주었다. 그래서 이제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가장 행복하다고.

 

  정오가 가까웠다. 곧 있으면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리라.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날이었다.

 

 *

 

 

 "내 얘기는 여기서 끝이데이. 어땠나? 별 건 읎제? 괜히 시간만 뺏은 것 같아가 미안타."

 "아니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래서, 행복하게…"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또 그거에요?"

 "아이다, 이건 쪼매 다르데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하믄, 얘기가 달라지제?"

 

  인근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눈을 빛내며 양복점 카운터 앞 스툴에 앉아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해온 것인지 몇 번이고 덧칠된 팻말에 적힌 CLOSED, 라는 문구를 눈으로 훑었다. 이 동네에 이사 온 이래, 단 한 번도 문이 닫힌 걸 본 적이 없는 가게였다. 주인도 벌써 몇 대째 바뀌어, 지금 가게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시초 되는 사람의 얼굴조차 모른다는 설이 돌 정도였으니.

 

 "얘기 잘 들었습니다. 그래서, 두 분은 지금 어떻게 되신 건데요?"

 "지금? 지금은… 잘 만나고 있다 안카나. 그 사람이 쫌 멀리 살고 있긴 한데, 그래도 가끔 들른데이."

 

  짙은 청록색의 머리칼을 가진 오드아이의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가게 문 쪽을 턱짓했다. 아니나 다를까, 뻐꾸기시계가 오후 1시를 알리기 무섭게… 키가 훤칠한 남자가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섰다. 매주 금요일 정시에 방문한다는 그 사람. 짤랑이는 차임벨 소리가 가게 안을 메웠다.

 

 "봐라, 내 말이 맞제?"

 "전 이제 자리 비켜드려야 할 것 같네요. 다음에 또 올게요. 그때는 부모님도 함께 오실 거에요. 곧 오빠 결혼식이 있거든요."

 "축하한다고 전해드리라. 참, 이거 갖고 가라."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던 여학생의 눈앞에 불쑥 그가 내민 것은 은방울꽃 꽃다발이었다. 잠깐 의아한 듯 자신을 향하는 시선에 그는 환히 웃으며 답했다.

 

 "꽃말, 꼭 기억하레이. '반드시 행복해진다'."

 

  감사해요, 카게히라 씨. 여학생의 얼굴에도 금세 봄볕 같은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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