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 DEW
미카가 마지막 드림페스를 마쳤을 때, 이츠키는 편지와 함께 이탈리아 행 왕복 항공권을 보내주었다. 미카는 후배들에게 답례 공연을 받는 것으로 『Valkyrie』 활동을 마무리 짓고, 슈가 보낸 티켓을 들고 비행기에 탔다. 성수기의 토스카나 주는 거주민들의 낡은 자동차와 여행객들의 캐리어로 가득 차 있었다. 슈는 미카를 외곽에 있는 마을로 이끌었다. 일부러 사람이 없는 곳에 호텔을 잡았다고 했다. 미카는 차창 너머로 인파 속에서도 마냥 나른한 풍경을 지켜보며 말했다. "스승님은 사람 많은 곳에 있으면 힘드니까, 그 편이 좋겠네." 그러자 슈가 답해왔다. "아니, 인파가 적은 편이 네가 숨을 트기 좋기 때문이다."
짐을 푼 후 미카는 슈를 따라 피렌체의 구시가지로 왔다. 사람 한 명 한 명, 조형물 하나하나, 심지어는 동상 밑에 적혀있는 주의문까지도 미카는 주목했다.
"카게히라!"
미카가 눈을 옆으로 돌릴 때마다 슈는 소리쳤다. 그러다 결국엔 미카의 옷을 붙잡고 질질 이끌었다. 미카는 미술관까지 목줄에 묶인 강아지처럼 끌려왔다. 그의 선택은 언제나 옳았으므로 반발을 할 셈은 없었지만, 분수 앞에서 한 인형사가 펼치던 인형극을 보지 못한 건 아쉬웠다. 입구에서 미카는 입을 삐죽 내밀고 꿍얼댔다. 여행인데, 좀 더 천천히 봐도 되지 않나? 그 말이 들렸는지 슈가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이 빠듯하다. 보여줄 게 이미 많아. 단순한 여행을 시킬 셈이었다면 널 이곳까지 부르지도 않았을 거다."
그리고는 그것 하나 알지 못 하냐고 되물었다. 미카는 아주 조금 억울했다. 슈가 보내온 편지에는 그런 이야기라고는 조금도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즐거운 여행을 예상하게 했다.
「카게히라, 너를 초대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마냥 따뜻하다고 느꼈던 메시지 속에, 읽지 못한 행간이라도 숨어 있었는지. 그러나 미카는 공항에서 슈를 오랜만에 마주했을 때도 그 메시지가 역시나 따뜻했다고 생각했었다. 게이트를 나왔을 때 미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슈를 찾았는데, 평소였다면 "카게히라, 여기다." 불렀을 그가 선 채로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더랬다. 슈는 미카가 그의 앞에 고개를 들이밀 때까지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카는 혹시 그를 닮은 조형물이 아닐지 의심까지 했는다. 가까이 다가서니 눈썹이 깜빡 움직였기 때문에 그때서야 슈가 맞다고 알 수 있었다. "스승님?"하고 물으니 그제야 "왔구나."하고는 나긋하게 웃어주었는데, 그 미소가 편지처럼 생소했으나 가슴을 울렸다. 그러니 미카는 스승님이 기분이 좋나보다 여겼고 그가 자신을 초대한 건 여행 목적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슈에게는 엄연히 목적이 있었다. 이름하야, 카게히라 미카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기.
미술관, 박물관, 성당……. 장소를 옮길수록 미카는 허기가 졌는데 슈는 식사를 허락할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미카는 길거리 음식이라도 하나 사 먹고 싶었다. 슈는 한 조각상 앞에서 미카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보고 익히라는 뜻이다.
"스승님아, 나 배고프다~.“
“집중해.”
구조 신호를 보낸 셈이었는데 빠르게 무시당했다. 배에서는 꼬로록 소리가 났다. 미카는 울상을 짓다가도 그가 시킨 대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조형물은 만지는 게 금지되어 있는데.' 그런 의문을 가질 때였다. 슈가 속삭였다. “손가락을 움직여.” 형태를 생각해서 손을 움직여 보라고 했다. 그는 원리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었다. 미카는 조각상과 멀찍이 떨어진 채로 허공에서 손을 움직였다.
느껴지지 않는 질감을 느끼라고 했다. 만질 수도 없는데 대체 무슨 말인가. 의문이 늘어날 즈음 슈가 미카에게 재질을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그러니 왠지 공기 속에서 질감이 매끈하게 손끝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윽고 슈는 미카에게 눈을 감으라고 했다. 미카는 그를 따라 눈을 감았다. 슈가 천천히, 나긋하게, 말했다. 손끝으로 형태와 질감을 느꼈다면 이제 눈으로 조금 전에 보았던 것을 직접 만들어내 보라고. 미카는 조각상을 공중에서 볼 수 없었으나 머릿속으로 그것을 하늘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모습을 상상했다. 도면을 그리고 형태를 재구성했다.
조각은 일종의 조경이야.
언젠가 슈가 가르친 적이 있다. 미카는 조각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그 주변을 꾸미는 모든 일들을 상상했고 머릿속에 구현해냈다. 기어코 하나의 공원을 만들어 낼 때, 슈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미카는 눈을 떴다. 눈앞의 광경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지만 미카는 제가 만들어낸 세계가 조각상 위에 덧씌워져 있다는 걸 느꼈다. 창조가 신의 행위라면 세상에는 무수한 신들이 있다. 미카는 신에 의해 신이 되었다. 미카는 자신을 만들어낸 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슈는 조각이 아닌 자신을 보고 있었다. 꽤 오래전부터 자신을 보고 있었던 듯했다. 미카는 예술품을 앞에 두고 어째서 눈을 돌리느냐고, 슈가 자신을 나무랄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슈는 미카를 막연히 바라보기만 했다.
눈과 눈이 세 번째로 얽힌 것은 피렌체의 거리 한복판에서였다. 시가지 전체가 보이는 공원에 그들은 있었다. 미카는 허기를 못 견디고 결국 크레페를 사러 갔다. 슈는 웬일로 허락해주었다. 덕분에 미카는 신이 난 채로 돈을 받아 매대에 달려갔다. 미카가 어쭙잖은 제스처로 주문을 하는 동안 슈는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관조했다. 미카는 그것이 꽤나 의아했다. 그는 자신의 인형이 제멋대로 구는 걸 매우 싫어했다. 더군다나 어설픈 광경을 자아낸다면 근 일주일 치 잔소리를 한 번에 할 법했다. 아마 미카가 아는 슈였다면 우선은 군것질을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허락 했다면 매대에 직접 다가가 능숙히 주문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크림을 다 빼내어 칼로리를 조절한 후에야 미카에게 주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 너그러운 태도가 미카로 하여금 위화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미카는 크레페를 받아들고, 잔돈을 외투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슈는 울타리에 기댄 채로 팔짱을 끼고 미카를 보고 있었다. 그때 두 시선이 다시금 얽혔다. 미카는 미술관에서 그가 보였던 눈빛과 공항에서 보였던 태도, 그리고 메시지 속에 묻어났던 그의 기쁨을 하나씩 추적해갔다.
설마, 싶은 길이 그 앞에 피어올랐다.
실낱같은 가정이 길 위에 깔렸다. 그들 간의 거리는 짧았고 직선으로 열 걸음 걸으면 되는 거리에서 슈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선이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어느 겨울날 미카는 그 눈빛을 거울 속 자신에게서 발견하고, 애써 지워낸 적이 있다.
‘알고 이러는 걸까.’
미카는 크레페를 한 입 베어 물고 걸음을 디뎠다. 맛을 보고, 달다고 학습을 한 뒤에.
"!?"
다짜고짜 달려가, 슈의 입에 크레페를 들이밀었다. 미카가 한 입 물었던 탓에 크림이 튀어나와있어 슈의 입은 금세 더러워졌다. 입술 밖으로 크림이 흘러내렸다.
"스승님."
반사적으로 미카는 웃었다. 조금 야릇한 기분이 등허리에서부터 올라왔다. 무슨, 하고 곧 슈가 난색을 표했다. 미카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 미카는 벌금을 각오하고 크레페를 땅에 버렸다. 쓰레기는 얼마든지 닦고 치울 수 있다. 그 앞에 크레페보다 먼저 주워 담아야 할 것이 있었다. 그건 오로지 미카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미카는, 발을 들고 슈와 얼굴을 맞대고는 그가 벌린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넣었다. 공항에서 내리꽂힌 시선에서부터 묘한 감을 느끼고 있었다. 슈가 미카를 아는 만큼 미카도 슈를 알았다. 이따금 미카는 슈보다 예민했다. 미술관에서 맞닿았던 시선은 손등에 전해진 체온보다 뜨거웠다. 이제는 혀와 혀가 얽혔다.
두 사람의 것이 아닌 시선이 그들에게 모여드는 것을 미카는 느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자신의 신이 몸을 얕게 떠는 것만을 느꼈다. 밀어내려는 듯이 움직이는 손목은 꽉 잡아, 그가 도망치지 않고 온전히 모든 것을 느끼도록 했다. 이츠키 슈가 느끼는 카게히라 미카의 감정 속에 결국 그가 들어 있었다. 그들은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었다. 서로에게 반사된 빛이 서로를 묶었다. 먼저 알아챈 쪽이 승리하는 포획 싸움이었다. 미카가 먼저 그를 붙잡았다. 손아귀에 잡혔다면 놓칠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그게 카게히라 미카가 체득한 『Valkyrie』의 마땅한 모습이었다. 군림하고, 압도시켜, 사로잡는다…….
미카는 슈의 입가에 묻은 크림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입술을 맞대었다. 뭉쳐진 크레페를 슈가 삼킬 때까지 입 안을 누비고 혀를 잡고 늘어졌다. 그가 숨이 가쁠 때가 되어서야 미카는 물러났다. 슈는 숨이 찬 지 잠시 숨을 내쉬었다가 눈을 찌푸린 채 자신을 보았다. 그가 곱씹을 감정들을 미카는 알고 있다. 미카도 그처럼 혼란스럽던 때가 있었다.
"이게, 무슨, 대체……!"
"스승님은 말이다, 가끔 쉬운 걸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데이."
"……."
"좋으믄, 좋다고 하믄 되는데?"
또, 슈가 멈췄다.
도합 네 번째의 시선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이번에는 제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조금은 자각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렇다면 더는 기다려줄 마음이 없다. 미카는 발을 그에게 내딛었다. 미카는 왼발을 슈의 구두 뒤에 대고, 앞으로 끌어 그가 저에게 몸을 숙이게 했다. 슈는 몸을 숙이다 땅에 떨어진 크레페를 밟았는데 미카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코를 맞대면서 미카는 그의 발을 닦아주는 상상을 했다. 분수에 그를 앉혀두고, 그 앞에 앉아 그를 더럽힌 모든 것을 닦아주는 일은 무척이나 행복할 것이었다. 슈는 머리 한 번을 쓰다듬어주지 않을 사람이다. 미카가 자신을 씻어내는 모습을 당연한 듯 내려 보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정수리에 내리 앉을 시선이 전과 다르리라는 걸 미카는 안다. 단순한 인형과 인형사로서 관계를 맺던 과거 속에서는 보인 적 없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그의 발밑에서 고개를 들어 그 시선을 마주하고 싶었다.
미카는 현재의 슈에게로 돌아왔다. 구두 끝이 더러워진 게 신경이 쓰이는지 그는 안색에 어두웠지만, 신발이 아닌 미카를 보고 있었다. 미카는 만족스러운 듯이 웃고는 눈을 감았다. 먼저 입 맞추지 않는다.
"하아……."
낮은 한숨.
그 후로 입술이 다가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카는 더 이상 그를 붙잡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땀에 젖은 손이 손을 맞잡아 왔다.
***
일 년 전, 슈가 거나하게 취한 채로 귀가한 날이 있었다.
겨우내 유학 준비를 마쳤던 그는 출국하기 전에 친구들을 만나러 갔었다. 그렇다고 하여 설마하니 이리도 고주망태로 귀가할 거라고 미카는 상상도 하지 못 했더랬다. 빨갛게 달아오른 코와 귀, 게슴츠레하게 뜨인 눈이 그가 취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슈는 멀쩡한 사람처럼 흔들림 없이 걸었다. 미카는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슈는 미카에게 푹 안겼다. 택시 조수석 창문이 열리고, 와타루가 그들을 지켜보았다. 미카는 슈를 안은 채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히비키 와타루는 미카가 키류 쿠로 이후로 가장 경계하는 사람이었다. 미카는 슈의 친구들을 좋아했는데─그들이 이츠키 슈가 표현하는 세상의 폭을 넓혀주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경계하기도 했다. 슈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문턱이 높은 만큼 친구가 된 이들이게 과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이츠키 슈의 친구란 언제 그를 상처 입힐지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미카는 그가 상처 입지 않기를 바랐다. 미카는 저도 모르게 와타루를 흘겨보며 말했다.
"스승님, 집에만 오믄 이러네."
와타루는, 풋, 하고 웃었다. 그 소리가 거슬렸다. 와타루는 그야말로 재밌다는 듯이 미카를 바라보았다. 왜 웃냐고, 물어도 답해줄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미카는 목례만을 하고 돌아섰다. 복잡 미묘한, 여럿 감정이 한꺼번에 차올랐다. 속을 까발려진 기분이 들었는데, 과연 그 속에 무엇을 보였기에 나는 이리도 불편한가. 미카는 혼란스러웠다. 미카는 슈를 부축한 채로 자신의 볼을 두어 번 쳤다. 지금 중요한 건 이름 모를 감정이 아니라, 슈를 보좌하는 일이다. 그는 우선수위를 정했다. 미카는 슈를 소파에 눕혀두고 부엌으로가 물을 끓였다. 차라도 타주기 위해서였다.
물을 끓여두고 다시 거실로 나왔을 때 슈는 소파에 누운 채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여러모로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미카는 그의 상태를 훑으면서 당장 해야 할 일을 정했다. 우선, 옷을 갈아 입혀주어야 한다.
"스승님, 정신이 드나?"
"…카게히라, 나의……♪"
"있네. 그라믄 겉옷부터 벗자, 응?"
슈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분고분히 몸을 일으켰기 때문에 미카는 그의 목도리를 풀어주었다. 이어서 코트를 벗기려 들 때였다. 위로 곧게 올리고 있던 팔을 갑작스레 내리더니, 슈가 미카를 끌어당겼다. 미카는 무방비하게 끌려갔다. 이윽고 소파 위에 두 몸이 엉켰다. 스웨터의 털실 꼬인 모양새가 얼굴에 고스란히 자국이 나겠다 싶을 정도로 세게 슈가 미카를 가슴에 당겨 안았다.
"오늘은, 이대로 같이 잘까."
"……."
삽시간에 미카는 해가 뜨고 벌어질 일들을 계산했다. 자신이 흐트러진 모양새로 소파에 드러누워 잠들었다는 것에, 더군다나 카게히라 미카를 이불처럼 덮었다는 것에 슈는 결벽을 느끼고 비명을 지를 것이다. 더군다나 책임 소재가 스스로에게 있으므로 모든 상황을 아주아주 끔찍하게 받아들일 게 분명했다. 그의 성격에 헛구역질을 할지도 모른다. 미카는 분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주말 아침은 평화로웠으면 했다.
미카는 생각에 잠긴 채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것을 수긍의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슈가 기분 좋은 듯이 웃었다. 슈는 몸을 꾸물꾸물 움직이더니, 옆으로 돌려 소파에 등을 바싹 붙였다. 그렇게 만들어낸 공간에 미카를 눕히고는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두 남자가 나눠 쓰기에 소파는 너무 비좁았다. 미카는 적당히 비위를 맞춰 주다가 떨어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슈가 볼을 매만지며 속삭여왔다.
"불편하면……침대로 갈까?"
"……."
"이러다 떨어지면, 네가 다치니까, 안 돼."
"……자각 없이 이라믄 큰일 난데이."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갔다. 미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몰랐다. 그가 자신의 말을 곱씹는 것보다 먼저 슈가 움직였다. 단어를 짚고 슈가 되물었다.
"자각?"
낱말은 쇠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미카는 쇠뭉치에 머리를 맞은 듯이 뒤로 넘어졌다. 그는 소파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쿵, 하고 제법 큰 소리가 났다. 슈는 그 광경을 보고 조금 웃는 듯하더니 눈을 끔뻑이다가 잠이 들었다. 미카는 흘러내린 채로 굳어 있었다. 소파에서 떨어진 모든 것을 미카는 천천히 주워 담았다. 머리, 몸, 다리, 그리고……정신. 미카는 몸을 반쯤 일으켜 푹 잠이 든 슈의 얼굴을 보았다. 술기운에 젖어 발개진 볼이 그가 제 정신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미카는 기억을 되짚었다. 슈는 눈을 게스츰레하게 뜨고는 속삭여 왔었다. 침대로 가자고. 그 말이 무섭도록 귀에 울렸다. 차라리 벌레의 날갯짓 소리 같았으면 성가셨을 텐데. 하필이면 사탕처럼 달콤하게 귓가에 감겨들어왔다. 그래서 두려웠다.
왜인지 그의 입술로 눈이 갔다. 목소리만큼이나 그의 숨도 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카는 입술이 저도 모르게 그에게 가까이 했다. 숨이 상상 만큼 달콤했다. 그래서 더더욱 이끌렸다.
입술이 숨 너머의 살에 닿기 직전이었다.
"……!!"
치이익, 부엌에서 주전자가 끓는 소리가 났다. 미카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급작스레 몸을 일으키다가 뒤에 있던 테이블에 등을 박았다. 그 탓에 테이블 위에 있던 꽃병이 넘어졌다. 다행이 깨지지 않아서 미카는 꽃병을 올려두고 떨어진 흙과 물을 티슈를 꺼내어 닦아냈다. 그래도 몸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심장이 뛰었다.
"아, 물!"
물을 끓여두고 있던 걸 완전히 잊고 있었다. 미카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일어서면서 테이블에 무릎을 한 번 더 부딪혔다. 눈물이 절로 나는데 왜인지 무릎보다 머리가 가슴이 아팠다. 처음 겪는 감정이 몸 곳곳을 때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설마……."
처음인데도 무슨 감정인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은 이러도록 만들어져 있구나. 몸에 색다른 열이 도는 것이 무서웠다. 미카는 가스렌지 불을 끌고, 마음을 추스르고자 했다. 그는 덤덤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감정이 나쁠지, 좋을지를 재지는 않았다. 미카는 변수를 고려했다. 하필 이츠키 슈에게서 독립을 해야 할 시기였다. 슈는 유학을 갈 예정이었고 미카는 자신만의 『Valkyrie』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서로를 일부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런…….
이런 변수는 생겨서는 안 된다. 미카는 볼을 부채질 하고, 거실을 돌아보았다. 슈가 마냥 무구한 얼굴로 잠이 들어 있었다.
다음날 슈는 일어나자마자 예상대로 비명을 질렀다. 모든 상황이 그의 결벽에서 어긋났다. 심지어는 미카가 부엌 식탁에서 침을 흘린 채로 자고 있었는데, 꿀물을 타려고 준비하다가 푹 잠이 들어버린 것으로 보였다. 슈는 미카를 당장 깨웠다. 미카는 잠이 채 다 깨지 못한 채로 슈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의 잔소리는 아주 길었는데, "이래서야 내가 없어도 잘 지낼 수 있겠냐" 는 말이 오래토록 반복되었다. 미카는 간밤에 씻어낸 감정을 잠시간 떠올렸다 지웠다. 감정을 게워내고자 세안만 네 번을 했더랬다.
미카는 잔소리가 끝날 즈음에야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 술만 줄여도 된 데이.”
그들이 서로에게 몸을 바싹 붙이고 입을 맞추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던, 일 년 전의 겨울이었다.
